[한강우칼럼] 집들이 소감

기사입력 : 2013년 01월 11일

 

집들이 초대를 받았다. 특별한 뜻을 지닌 집들이라 기꺼이 가기로 했다. 6번 도로를 따라 1시간쯤 달리다 오른쪽으로 틀어 메콩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고 아스팔트길과 황톳길을 30여 분쯤 더 달리니 한적한 시골에 새로 지은 집이 나타났다. 3미터 정도의 시멘트 기둥을 세운 다음 그 위에 판자를 깔고 벽을 두른 전형적인 캄보디아 가옥이었다. 지붕에는 청색 기와를 얹고 아래층에는 주방과 수세식 화장실까지 깔끔하게 갖추어 놓았다. 초목으로 한국의 원두막같이 집을 짓고 사는 이웃집들에 비해 단연 돋보이는 집이었다. 집을 새로 짓는 데 1만 달러가 들었다고 했다. 이 집 가장의 한 달 벌이가 100달러 남짓한 형편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큰돈이 들어간 셈이다.

5년 전, 17살 소녀가 우리 학교 청소원으로 들어왔다. 먼저 들어와 일을 하다가 결혼 때문에 그만둔 언니 후임으로 들어왔는데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언니 못지않게 일을 잘했다. 무엇보다도 심성이 착해서 교실과 사무실은 물론 내 숙소의 모든 열쇠를 가지고 있었지만 3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겸손하고 싹싹해서 학교를 방문하는 손님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일을 시작한 지 2년쯤 됐을 때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에 근로자로 가라고 권했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자신이 어려워했지만 일하는 시간을 조정해 주면서 틈틈이 한국어를 익히게 해서 한국에 보냈다. 2년 전의 일이다.

“월급 1,600달러 받았어요!”
첫 월급을 받고 나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감격에 겨워 울먹울먹하던 2년 전 기억이 생생하다. 학교의 마지막 월급이 100달러도 안 됐었는데 한 달에 1년치 이상의 급료를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1남 6녀의 다섯째인 이 딸이 한국에서 보내 준 돈으로 이번에 새 집을 짓게 되었다. 가족들의 기쁨만큼이나 나의 기쁨도 크고 뿌듯했다. 한 사람이 한국에 가서 버는 돈이 가족 전체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얼마 동안 더 일을 하고 돌아올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3년 정도만 일을 한다고 해도 그 돈을 모으면 캄보디아 시골 동네에서는 부자 소리를 들으며 살 수 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 또 어디 있을까.

마당에 행사용 텐트를 치고 한쪽에서는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저녁 무렵이 되니 친척들과 이웃사람들이 몰려들어 마당을 가득 채웠다. 바로 옆 사람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확성기 볼륨을 높이고 노래를 부르면서 잔치의 흥을 돋웠다. 몇 가지 고기 요리를 중심으로 잔칫상을 준비했는데 가난한 집안에서 내놓을 수 있는 성대한 상차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낯모르는 부부가 다가와 정중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몇 달 전에 한국에 취업해 간 딸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다. 그 딸도 우리 학교에서 청소원으로 일했는데 내가 한국어를 가르쳐 한국에 보냈다. 엊그제 첫 월급을 보내왔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부부를 따라 잔칫집에서 두 집 건너에 있는 그들의 집을 방문했다. 캄보디아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목으로 엉성하게 지은 집이었다. 내년쯤 이곳에도 근사한 새 집이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캄보디아 젊은이들의 한국행, 한 사람이 몇 년간 한국에서 일하고 오면 시골 인근에서는 일약 부자 소리를 들으면 살 수 있는 길이 생긴다. 한 집안이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을 일시에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저런 도움을 줘서 한국에 보낸 젊은이가 열댓 명, 행복한 집들이 초대장이 또 날아올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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