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캄보디아 풍운아 노로돔 시하누크

기사입력 : 2012년 10월 30일

올해 프놈펜 우기 끝자락은 고국의 장마철 끝물을 떠올리게 한다. 한차례 열대스콜이 쏟아지면 쨍하게 개곤 하던 도시는 연일 물안개에 싸인 채 비가 오락가락한다. 늦은 오후 기어이 다시 비를 뿌린다. 빨강 우비로 단장한 피자배달부가 노랑 피자집 깃발을 펄럭이며 미끄러지듯 오토바이를 달린다. 이렇듯 비가 오는 날이면 한층 고소하게 풍기는 피자향, 어느 집에선가 창밖의 빗방울 소리를 즐기며 이야기꽃을 피울 터이다. 비 이야기는 여기까지로 족하다. 계속되는 폭우로 저지대 주민은 가재도구를 잃고, 수상가옥이 통째 날아가고, 낙뢰피해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이런 아비규환의 상황은 모르는 채로 살고 싶고 그 뒤치다꺼리는 누군가 해줬으면 하는 게 인지상정인 것이다.
 
노르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전 국왕이 89세 나이로 서거했다. 농구선수, 재즈광, 배우, 영화감독, 작곡가, 언론사 논객으로, 많은 재능을 타고난 그의 청춘기는 호방한 생활 그 자체였다. 여성편력 또한 화려하여 여섯 여인이 비로 간택 되었으며 슬하에 열 네 자녀를 두었다. 실권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태어난 그로서는 골치 아픈 정사는 권력에 목마른 위정자에게 내던지고 그럭저럭 동화 속 왕처럼 궁궐생활에 안주할 수도 있었을 터이다.
1941년 프랑스치하에서 18살의 나이에 왕으로 즉위한 그는 조국이 독립되자 정권의 상징일 뿐인 왕위를 양도하고 현실정치의 길을 택한다. 선거에 의해 명실공히 권력의 정점에 오르면서 파란만장한 도정이 시작된다. 론놀 쿠데타로 사형을 언도받기도 했고, 크메르루주 대학살에 대한 죄의식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베트남 침공 때는 게릴라전에 투신하기도 했다. 20년을 넘긴 망명생활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버텨냈다. 동서 강대국 사이의 줄타기 외교, 권력에의 의지로 자행된 축출과 이합집산, 야만적인 자국민학살의 격랑에서도 “6백만 우리 국민은 내 아들 딸이다” 허풍스런 유머감각도 잃지 않았다. 망구십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웹사이트에 글을 올리며 세상과 인연의 끈을 이어왔다.
알렉산더 대왕은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아누크왕은 영욕의 세월을 살았지만, 삶을 사랑함에 있어서 기꺼이 갈 데까지 가본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야 누구나 사랑할 수 있지만, 변덕스런 인간본성, 생존의 비루함, 권력의 잔인성으로 점철된 절망의 바닥까지 가보고도 세상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갈 데까지 가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럴싸해 보이는 것만 쫓는 겉핥기식 삶이 넘치는 세상에 약소국인 조국의 뒤치다꺼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걸출한 풍운아의 이야기는 마음을 뜨겁게 한다. <끝>/나순 (건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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