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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칼럼] 프놈펜의 한가위
죽음은 삶을 새로이 추스르게 한다. 여든 다섯 해를 살다 가신 시어머님의 죽음은 고인의 인생을 돌아보게도 했지만 뒤에 남겨진 후손 저마다의 삶을 수습해 보는 시간이 되었을 터이니. 전쟁이 몰고 온 시대의 격랑, 부침이 심한 전후의 사업, 자식들의 힘겨운 입신…, 지난한 삶의 연속선상에서 이제 조금 살만하다 싶다하시던 차에 돌아가셨다. 자식을 품었던 거푸집같이 빈 껍질만 남은 노구가 한 줌 재가 되어 나왔을 때 남편의 어깨는 심하게 들썩였다. 나이든 남자의 울음만큼 착잡하게 만드는 것도 없으리라. 시어머니와 내가 사는 세상이 영영 달라졌지만, 어느 쪽 세상이 더 나은지 알 길이 없다싶은 나이가 돼서인지 그다지 슬프지 않은 게 더 슬펐다. 앞으로 나에게는 몇 차례나 더 누군가를 덥혀줄 수 있고 누군가로 인해 더워질 수 있는 세월이 남겨져 있을까.
큰일 치를 때는 덤덤하더니 뒤앓이를 하는지 시모의 기척이 마음을 맴돈다. 서글픔 따위에 잠식당하기 싫어 온몸을 잔뜩 웅크린다. 두 무릎을 당겨 끌어안으니 발톱이 눈에 들어온다. <손톱은 슬플 때마다 돋고 발톱은 기쁠 때마다 돋는다.> 사노라면 슬픈 일이 기쁜 일보다 더 많다는 우리 속담처럼 발톱은 조금 자라있을 뿐이다. 그래도 발톱을 깎기로 하고 손톱깎기를 들이댄다. 손톱깎기의 날과 발톱사이 거리조절이 아슬아슬하다. 머지않아 돋보기를 써야 할 처지이고 이 잘난 발톱을 깎으려고 누군가를 성가시게 해야 할지도.
갓 시집와 시어머니 따라 사우나에 갔던 생각이 난다. 목욕 후 하얗게 불어 무처럼 보드라워진 발톱을 시원하게 깎아주시며 “너는 이쁜 데도 없고 미운 데도 없구나.” 하신다. 말씀 말미에 “아가야, 나중에 내가 더 꼬부라지면 발톱손질 해 줄 거지?” 다짐도 잊지 않으신다. ‘예쁜 데도 없다’는 말씀에 날을 세웠던 마음이 무뎌지고 ‘미운 데도 없다’는 말씀이 겨우 느껍게 다가 올 즈음, 그녀는 다른 세상 사람이 되었다. 베풀었던 사람에게 돌려받는 경우가 드문 걸로 보아 인생은 늘 엇갈리게 마련인지 그녀의 발톱손질은 엉뚱한 사람 몫이 됐다.
명절 또한 삶을 다시금 추스르게 한다. 고향, 피붙이, 추억의 파편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막상 어머니가 안 계신 명절을 떠올리니 끈 떨어진 연의 심정이 되고 만다. 절을 올리다 엉덩방아를 찧은 어린 손자의 모습에 박장대소하시며 “화초 중에 제일가는 것은 인화초(人花草)지…”라는 말씀을 연신 되풀이하시던 시어머니, 시국성토에 밤 깊은 줄 모르던 남자들, 동동거리는 와중에도 수다가 끊이지 않았던 여자들…, 세월 탓인지 해묵은 명절의 소란에서 전통의 비의(秘意) 같은 것이 느껴진다. 무심한 자식새끼들 불러들이고 싶은 욕심에 그다지도 질색했던 시모표 차례상을 프놈펜에 차리게 될 날도 머지않았지 싶다./ 나순 (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