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프놈펜의 한가위

기사입력 : 2012년 09월 17일

죽음은 삶을 새로이 추스르게 한다. 여든 다섯 해를 살다 가신 시어머님의 죽음은 고인의 인생을 돌아보게도 했지만 뒤에 남겨진 후손 저마다의 삶을 수습해 보는 시간이 되었을 터이니. 전쟁이 몰고 온 시대의 격랑, 부침이 심한 전후의 사업, 자식들의 힘겨운 입신…, 지난한 삶의 연속선상에서 이제 조금 살만하다 싶다하시던 차에 돌아가셨다. 자식을 품었던 거푸집같이 빈 껍질만 남은 노구가 한 줌 재가 되어 나왔을 때 남편의 어깨는 심하게 들썩였다. 나이든 남자의 울음만큼 착잡하게 만드는 것도 없으리라. 시어머니와 내가 사는 세상이 영영 달라졌지만, 어느 쪽 세상이 더 나은지 알 길이 없다싶은 나이가 돼서인지 그다지 슬프지 않은 게 더 슬펐다. 앞으로 나에게는 몇 차례나 더 누군가를 덥혀줄 수 있고 누군가로 인해 더워질 수 있는 세월이 남겨져 있을까.
 
큰일 치를 때는 덤덤하더니 뒤앓이를 하는지 시모의 기척이 마음을 맴돈다. 서글픔 따위에 잠식당하기 싫어 온몸을 잔뜩 웅크린다. 두 무릎을 당겨 끌어안으니 발톱이 눈에 들어온다. <손톱은 슬플 때마다 돋고 발톱은 기쁠 때마다 돋는다.> 사노라면 슬픈 일이 기쁜 일보다 더 많다는 우리 속담처럼 발톱은 조금 자라있을 뿐이다. 그래도 발톱을 깎기로 하고 손톱깎기를 들이댄다. 손톱깎기의 날과 발톱사이 거리조절이 아슬아슬하다. 머지않아 돋보기를 써야 할 처지이고 이 잘난 발톱을 깎으려고 누군가를 성가시게 해야 할지도.
갓 시집와 시어머니 따라 사우나에 갔던 생각이 난다. 목욕 후 하얗게 불어 무처럼 보드라워진 발톱을 시원하게 깎아주시며 “너는 이쁜 데도 없고 미운 데도 없구나.” 하신다. 말씀 말미에 “아가야, 나중에 내가 더 꼬부라지면 발톱손질 해 줄 거지?” 다짐도 잊지 않으신다. ‘예쁜 데도 없다’는 말씀에 날을 세웠던 마음이 무뎌지고 ‘미운 데도 없다’는 말씀이 겨우 느껍게 다가 올 즈음, 그녀는 다른 세상 사람이 되었다. 베풀었던 사람에게 돌려받는 경우가 드문 걸로 보아 인생은 늘 엇갈리게 마련인지 그녀의 발톱손질은 엉뚱한 사람 몫이 됐다.
명절 또한 삶을 다시금 추스르게 한다. 고향, 피붙이, 추억의 파편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막상 어머니가 안 계신 명절을 떠올리니 끈 떨어진 연의 심정이 되고 만다. 절을 올리다 엉덩방아를 찧은 어린 손자의 모습에 박장대소하시며 “화초 중에 제일가는 것은 인화초(人花草)지…”라는 말씀을 연신 되풀이하시던 시어머니, 시국성토에 밤 깊은 줄 모르던 남자들, 동동거리는 와중에도 수다가 끊이지 않았던 여자들…, 세월 탓인지 해묵은 명절의 소란에서 전통의 비의(秘意) 같은 것이 느껴진다. 무심한 자식새끼들 불러들이고 싶은 욕심에 그다지도 질색했던 시모표 차례상을 프놈펜에 차리게 될 날도 머지않았지 싶다./ 나순 (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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