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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칼럼] 캄보디아 새로운 정국에 즈음하여
어릴 적에 아이들끼리 놀다 다투게 되면 피붙이는 물론 사돈네 팔촌까지 달려들어 시비불문 상대를 패주는 집안이 있어 부러웠다. 우리 집은 역성은커녕 바깥일로 눈물바람을 하며 대문으로 들어섰다가는 부친의 회초리감이라 밖에서 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했다. 뒤끝이 긴 성정 탓에 울음 끝도 길어 흙먼지를 뒤집어 쓴 볼에 선명한 두 줄기 눈물 골을 닦아내다가도 다시금 설움에 복받쳐 체재기를 멈추는데 한참씩 걸리곤 했다. 그 족속은 근동의 소문난 패거리로, 몰려다니며 술도가니 방앗간이니 이권마다 개입해 불온감을 조성하는 것은 물론, 툭하면 싸움판을 벌여 동네사람들이 슬슬 피해 다녔다. 그런 뒤끝이 좋을 리 없는지 차츰 발붙일 곳이 없어져 하나 둘 고향을 등지게 되었던 것 같다.
권력 무상에 대한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수히 많다. 성낙주의 <왕은 없다>에 양녕대군이 세자시절 아버지 태종의 처소를 엿보는 대목이 나온다. 문짝부터 사방 바람벽이 온통 하얀 종이로 도배되어 있고 그 흔한 가구하나 없는 순백의, 무의 공간이다.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거쳐 정권을 거머쥐고 왕권강화를 위해 공신과 외척을 무자비하게 베어낸 무소불위의 권력자인 아버지가 혹여 자객이 은신할세라 누군가 폭약이라도 숨겨놓을세라 무덤 속 같이 삭막한 곳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에 대한 경고로, 천하대권의 권좌 위에는 머리카락 한 올에 매달린 검 한 자루가 서슬 퍼런 칼끝을 왕의 머리로 향한 채 번득이고 있다는 <다모클레스의 검> 얘기를 비유로 들기도 한다.
캄보디아가 총선 후유증을 앓고 있다. 집권당의 낙승 예상과 달리 곱절 가까이 의석을 늘리면서 바짝 추적한 야당에서 부정선거 의혹까지 제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투표는 총알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투표 결과를 보고 훈센 총리도 아차, 싶었을 터이다. 폴폿시절에 대한 트라우마 탓인지 수도권 긴장무드 뉴스와 SNS에 떠도는 소문에 놀란 근로자들이 귀경을 미루기도 하고, 가족의 권유에 못 이겨 귀향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등 산업 현장에도 차질을 빚고 있다. 훈센 총리가 집권한 지 올해로 28년째다. 어떤 형태의 장기집권이든 최소한의 자발적인 지지자 없이는 존속하기 힘들뿐더러, 내전, 기아, 무지 등, 그 나라의 제반 실정을 무시한 채, 정치가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사가에 따르면 민중봉기는 가난에서 벗어나 막 소비의 단맛을 본 시점이나 정치적으로 호전되었다가 갑작스레 억압받는 시점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 성마른 대중에 의해 권력의 내리막길이 낭떠러지가 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번 총선결과로 보건대 캄보디아도 정치적 분기점에 이른 듯하다. 여당 독주에 대한 야당 견제체제 확립으로 정국이 흔들릴 수 있지만 캄보디아 민주주의는 진일보한 셈이다. 오랜 정치이력을 지닌 양당의 총수가 패권다툼의 차원을 넘어 평화적 조율을 통해 혼란정국을 풀어갔으면 싶다. / 나순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