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 루즈 정권 참상 알린 선구자…프랑수아 폰쇼 신부 별세

기사입력 : 2025년 01월 22일
▲ 프랑수아 폰쇼 신부가 2021년 12월 14일 프놈펜의 프랑스 연구소에 있는 카르네 다시에 서점에서 열린 책 사인회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 프랑수아 폰쇼 신부가 2021년 12월 14일 프놈펜의 프랑스 연구소에 있는 카르네 다시에 서점에서 열린 책 사인회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1977년 저서를 통해 크메르 루즈 정권의 학살 실태를 처음으로 세계에 알린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신부 프랑수아 폰쇼가 지난 17일 프랑스에서 별세했다. 그는 오는 2월 8일에 만 86세가 될 예정이었다.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인 폰쇼 신부는 생애 대부분을 캄보디아에서 보냈다. 알제리에서 공수부대로 의무 군복무를 마친 후 폰쇼는 전교회에 합류해 1964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1965년 캄보디아로 파견됐다. 그는 처음 깜뽕짬과 바탐방에서 캄보디아어를 공부한 뒤, 깜뽕짬 지역의 가톨릭 공동체를 맡게 됐다.

1970년 캄보디아에서 내전이 시작됐다. 노로돔 시하누크 왕자가 축출된 후 중국으로 망명해 크메르 루즈 세력의 공식 지도자가 되었고, 이들은 북부 캄보디아에 근거를 두고 베트남군의 지원을 받았다. 이로 인해 론 놀 정부군은 캄보디아에 정착해 있던 베트남계 공동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수천 명이 학살되었다. 당시 폰쇼는 베트남계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힘썼고, 그들을 전쟁이 한창이던 남베트남으로 피난시켰다.

1975년 4월, 크메르 루즈가 프놈펜에 입성하며 도시를 장악했을 때, 폰쇼는 프랑스 대사관에 있던 수백 명의 외국인 및 캄보디아인들과 함께 있었다. 크메르 루즈 지도부와의 협상 끝에 대부분의 캄보디아인들은 대사관을 떠나야 했고, 일부 외국인들과 결혼한 여성들만 남을 수 있었다. 폰쇼는 1975년 5월 8일, 대사관 열쇠를 크메르 루즈 북부 지역 책임자에게 직접 넘기며 마지막으로 대사관을 떠났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폰쇼는 크메르 루즈 정권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증언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와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캄보디아 난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1977년 저서는 유엔과 국제 사회의 무관심을 강하게 비판하며, 크메르 루즈 정권을 인간성을 상실한 이념적 광기의 극단으로 묘사했다.

1979년 크메르 루즈 정권이 붕괴한 뒤에도 폰쇼는 1980년대 태국에 있는 캄보디아 난민 캠프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1991년 파리 평화 협정 이후 캄보디아로 돌아온 그는 캄보디아어로 성경과 기독교 문서를 번역하며, 가톨릭 전통을 캄보디아 문화에 맞게 적응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서구식 교회의 딱딱한 좌석 대신, 캄보디아 전통에 맞춰 낮은 좌석이나 바닥 매트를 사용하는 교회 디자인을 제안하기도 했다.

2006년 발간한 소책자에서 폰쇼는 “불교도와 기독교도 모두 자신이 명확히 보지 못하는 길을 따르려 한다”며 “서로 다른 종교에 속하더라도 오늘날 세상에 빛을 비추기 위해 함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21년 12월 캄보디아를 떠나며, 폰쇼는 이 나라에서의 행복한 기억들을 가슴에 품었다고 말했다. 그는 “캄보디아인들의 기쁨은 어디에서나 느껴진다”며 “물축제에서나 시골로 나갔을 때나, 그들의 기쁨은 늘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