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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더 알아보기] 제84화 뿌람삐 마까라(1979년1월7일) 전후의 내전상황
▲ 2020년1월7일 승리의 날 기념식에서 훈센의 ‘Win-win 정책’ 팻말
코로나 19가 맹위를 떨치며 2020년을 지나 캄보디아에도 새해가 밝았다. 1월 중 가장 경사스러운 제7일은 현 정부의 기원을 밝히는 “학살정권 퇴치일(Victory Day)”로서, 올해는 42주년을 맞이한다. 정부차원의 대규모 행사는 조직되지 않을 것으로 보도됐지만 군 장성의 가정에서는 음악소리가 높을 것으로 예상한다. 다변가 훈센 총리의 지칠 줄 모르는 연설들 중에는 당시를 전하는 무용담이 있다. 얼마나 미화되고 각색됐든지간에 좌중들과 그때를 회고하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 오늘날의 평화와 번영의 가치를 부각하는 데 있다.
훈센 총리는 1970년3월 친미계열 론놀정권의 쿠데타로 망명생활을 하던 노로돔 시하누크 왕자가 대국민 항전을 호소하자 크메르루즈에 합류했다. 당시 시하누크 왕자는 론놀정권을 타도하고자 크메르루즈와 연합해서 민족통일전선(FUNK)을 결성하고 망명정부(GRUNK)를 세웠다. 부패와 무능을 보이던 론놀정권은 좌익세력 소탕에 열을 올리며 캄보디아 동부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1955-1975)이 종식되고 미국이 인도차이나반도를 철수함에 따라 론놀정권 지도부는 국외로 달아나버렸다.
미국에 질려버린 민초들의 향방은 1975년 프놈펜에 입성한 크메르루즈 군대를 환영했다. 하지만 극단적 공산주의자 뽈뽓 총리와 지도부는 국가 재건에 실패하고 기아와 질병을 심화시켰다. 노동자와 농민의 고혈로 취득한 무기로 ‘앙코르제국의 부활’을 기치로 무모하게도 베트남 영토침범을 일삼고 반베트남 정서를 부추겼다. 1976년 중반에 양국은 국경문제를 협상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첨예화됐고 국경지대를 따라 게릴라식 전투가 이어졌다.
1978년1월, 베트남군은 크메르루주 지도부의 분열을 획책했고, 뽈뽓의 대대적인 반역자 숙청작업은 부사령관이던 헹삼린(1934~;現국회의장)의 탈주를 유발했다. 4월에는 베트남과 재협상에도 실패해서 크메르루즈군은 베트남을 침공해 3천여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에 베트남은 6월에 폭격기 30대를 띄워 캄보디아 국경의 인명을 살상하는 보복을 자행했다. 이때 생존한 다수의 지도부가 베트남으로 귀순했고, 여기에 훈센 총리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구 소련의 지원을 받던 베트남은 크메르루즈 정권을 중국의 괴뢰정권으로 간주했고 중국도 미국과 다름없는 외세로 인식했다. 이에 침략을 정당화하는 선전물을 배포하고 크메르루즈 반대세력을 앞세워 프놈펜으로 진격했다. 선두의 헹삼린은 1978년12월에 크메르루즈 반대세력이 결성한 ‘민족해방통일전선(KUFNS)’의 수장이었다. 1979년1월7일, 프놈펜 함락 후 그는 캄푸치아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인민혁명당(CPP의 전신)의 총재가 됐다. 그러나 베트남의 괴뢰정권이라는 오명으로 그의 정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태국 국경으로 밀려났어도 중국과 미국의 지원으로 크메르루주와 기타 세력들은 정부군에 위협적이었다.
▲ 1979년11월, 태국 국경의 반정부군이 사열한 모습
한편, 크메르루즈를 지원하던 국가들은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에 직면하자 시하누크 왕자의 복귀를 주선하고 반공주의자 손산의 국민해방전선(KPNLF)과 크메르루즈가 연합하도록 도왔다. 1982년6월에 탄생한 ‘민주캄푸치아연합정부(CGDK)’는 캄보디아의 정부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헹삼린 정권의 타도를 위해 내전을 이어갔다. 이와 맞물려 구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 붕괴에 동반해서 1989년초 베트남은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했다. 캄보디아를 감당할 수 없던 베트남군이 10년만에 철수하자 헹삼린 정권은 끈 떨어진 연 신세로 전락했고 CGDK에 맞서 군사력도 턱없이 약했다.
크메르루즈군이 주변지역을 삼키며 프놈펜으로 침투하던 중, 1991년10월23일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중재로 프놈펜 정부와 CGDK가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체결됐다. 그리고 유엔임시행정기구(UNTAC) 주관아래 1993년5월23일 총선을 치루고 입헌군주국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역사적 전환점이 됐던 10월23일은 2019년까지 매년 공휴일로 지정해서 파리평화협정일로 기념했다. 또한 오늘날 전역에 설치된 국민당(CPP) 입간판마다 헹삼린 정권의 실세 3인방의 초상을 확인할 수 있다.
‘뿌람삐마까라’의 선봉장이자 국민당(CPP)의 초석을 다진 3인방은 바로 헹삼린, 찌아심, 훈센이다. 헹삼린은 1991년 파리평화협정이후에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나 지금까지 CPP의 정통성을 지키는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빛낸다. 찌아심(1932-2015)도 1978년에 크메르루즈군을 이탈했으며 KUFNS의 부주석을 역임했는데, 2015년 사망 후 현재는 입간판에서 초상을 볼 수 없다. 훈센은 외무부 장관과 부총리를 역임하다가 1985년부터 총리에 취임해서 올해로 37년차에 접어들었다.
글 이영심
왕립프놈펜대학교 한국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