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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더 알아보기] 제75화 킬링필드의 출발은 미국의 베트남전
11월9일은 캄보디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53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당시의 혼란한 정국을 주도했던 노로돔 시하누크 선왕은 지금 없지만, 대신에 그를 존경했던 스트롱맨 훈센 총리가 국기를 움켜쥔 채 여전히 눈발이 거센 에베레스트산을 닮은 캄보디아를 지킨다. 오늘날은 군대의 동원 없이도 드론을 띄워서 말을 듣지 않는 빈민국의 영토쯤은 얼마든지 초토화시킬 수 있는 미국이 권세를 쥔 시대이다. 최근에도 캄보디아 남부해안의 개발에 대해서 정부가 공개적으로 군사기지가 아니라고 부단히 발뺌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인공위성 관측자료를 근거로 중국의 군사 기지화가 의심된다면서 제재한다.
▲ 미국의 미사일 폭격으로 초토화된 쁘레이웽주 네악릉지구의 모습
미국이 베트남전쟁(1955-1975) 중에 캄보디아에서 자행한 살상을 조사하면서 충분히 공감할 부분은 정말 이들이야말로 국제전범재판소에 세워져야 한다. 크메르루즈 지도부였던 뽈뽓, 누언체아, 키우삼판 때문에 대략 200만의 인명이 희생됐다고 전세계적으로 부각됐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이들도 미국이 자행한 패권 다툼에서 파생됐을 뿐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자신들의 양심을 막대한 원조로 팔아치우고, 캄보디아 땅에 대량 폭격을 지시한 당시 닉슨 정부의 헨리 키신저(1923-) 국무장관은 뻔뻔스럽게도 노벨평화상까지 수여받았다. 오늘날도 굶주린 캄보디아가 굽신거려야 당연한 약소국의 멍에를 과연 누가 씌우는지 비겁한 미국이라는 국가에 따져보고 싶은 것이 지금 훈센 총리의 심정일 것 같다.
베트남전쟁은 1954년 프랑스 식민지에서 막 탈출한 베트남이 한국처럼 남과 북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부패한 우익 쪽 민심의 향방이 공산화에 기울자, 국가 전체가 사회주의로 될 것을 우려한 미국이 이를 막고자 남베트남을 지원하려고 전쟁에 뛰어들면서 본격화됐다. 당시에 캄보디아는 정치활동을 위해서 왕위를 부왕에게 넘긴 시하누크 공이 북베트남(이하 베트공)의 지원을 받던 캄보디아 공산당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국과의 군사원조협정을 체결했다. 그리고는 표면적으로 중립외교정책을 선전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언론통제, 좌익세력 핍박, 친미성향 견제, 부정선거 등으로 독재자의 면모를 가감없이 발휘했다.
시하누크 공의 강력한 리더십은 1955년이후 10여년간 캄보디아가 황금기라고 불릴 만큼 정치적 안정 속에서 번영을 누리는 단초가 됐다. 그러나 베트남전의 영향은 피할 수 없었고 1958년에 미국이 지원하던 남베트남 정부군이 베트공을 쫓는답시고 캄보디아 땅을 침공했다. 이후부터 미국과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친미성향의 정적들은 정부전복을 시도하며 불안정을 초래했다. 이에 시하누크 공은 1960년대초 좌익단체 및 중국 공산당과 전략적인 동맹을 추진하고 반미노선에 편승했다. 1964년에는 중국 공산당의 군수물자 수송로로 시하눅항을 베트공에 내어주는 비밀협약을 체결하고 이듬해는 미국과의 외교를 단절했다.
▲ 미국의 미사일 폭격으로 캄보디아 전역에 발생한 크레이터의 흔적
한편 미군은 캄보디아와 베트남 국경지대의 베트공 군사기지에 수만 톤의 폭탄을 투하함에 따라 베트공은 보다 안전한 캄보디아의 동부지대로 숨어들었다. 동시에 캄보디아 정계는 미국과의 단절을 아쉬워한 상업자본가들의 지지로 보수 성향의 론놀을 총리로 하는 새 정부가 구성됐다. 또한 1969년초 미국에 닉슨 정부가 들어서면서 캄보디아는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쟁에 휩쓸렸다. 3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미국의 공중폭격 횟수는 3천5백여 회에 달했고, 캄보디아 공산당과 베트공이 캄보디아 전역으로 달아나면서 무고한 인명 살상을 부추겼다.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은 캄보디아 국방에도 위협적임에 따라, 1970년에 친미세력은 론놀을 앞세워서 시하누크 공을 정치권에서 제명하고 측근들도 제거함으로써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론놀 정부군은 자국내 베트남인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미국군 및 남베트남 정부군과 합동으로 공산당 무리가 산발적으로 숨어있던 동부지역에 수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미국 단독으로도 의회에서 폭격 중단이 결정되기 전까지 1972년말부터 1973년초까지 캄보디아 변방에 약 10여만톤의 공중폭격을 계속했다.
이상의 내용은 양기식(1997), 『영광과 비극의 캄보디아 역사』의 내용을 간추렸다. 이 밖에도 다양한 자료에서 미국이 캄보디아에 자행한 비인도적인 폭력을 보고한다. 구체화된 수치로는 미국 공군 데이터에 의거 1969-1973년에 47만톤 이상의 폭발물을 떨어뜨렸으며, CIA 보고서는 1970-1975년에 60만~7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폭격으로 초토화가 된 캄보디아 땅은 기아와 굶주림으로 허덕였다. 때문에 크메르루즈 집권이후 실제로 뽈뽓 정권에 의해 처형당한 수는 10만~30만이며, 나머지 70만~100만은 기아와 굶주림, 질병으로 희생됐다고 보고되는 정황이다.
글 이영심
왕립프놈펜대학교 한국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