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더 알아보기] 제67화 앙드레 말로와 반띠스레이 사원

기사입력 : 2021년 0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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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드레 말로(1935년 촬영됨)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는 20세기 중반 프랑스 좌파 지식인으로 불리며 정치가, 소설가, 논평가로서 《정복자》, 《인간의 조건》, 르포르타주 소설의 걸작 《희망》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일찍이 파리 동양어학교에서 산스크리트어, 중국어, 베트남어를 익힌 그는 고고학 회보에서 크메르족 사원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접했다. 21세 되던 1923년에 북(北)라오스 고고학 조사단을 따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떠났다. 당시 서양에서는 프랑스 탐험가 앙리 무오(Henri Mouhot, 1826-1861)의 인도차이나 반도 탐험 기록과 솜씨가 뛰어난 그의 스케치가 전해지면서 캄보디아가 거대한 신비의 땅으로 명성이 높아졌을 때이다.

프랑스 대문호 앙드레 말로의 생애 전반적 활약상이나 업적에 비해서 20대 초반의 그는 돈벌이에 혈안이 된 도굴범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캄보디아에 도착한 앙드레 말로 일행은 미술 수집가와 박물관에 판매할 유물을 수집하고자 앙코르제국 일대의 미개척 지역을 탐험하며 숨겨진 사원을 찾아 다녔다. 이처럼 당시의 고고학자들은 프랑스 정부의 승인아래 앙코르 지역에서 많은 유물을 반출해 갔고, 이 중 대부분은 오늘날 파리의 기메동양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도굴범 앙드레 말로의 눈에 띈 곳은 바로 앙코르톰에서 북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여인의 성채’라는 뜻의 반띠스레이(Banteay Srei) 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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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띠스레이 사원

반띠스레이 사원은 힌두교 시바신에게 헌정된 10세기 사원으로 앙코르 지역에서 유일하게 왕권의 개입 없이 지어진 주요 사원이다. 1936년 제1 외벽의 동문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사원의 건립자는 야즈나바라하(Yajnavaraha)라는 왕족 출신의 브라만 계급으로, 라젠드라바르만 2세의 스승이자 자야바르만 5세의 장인이었다. 사원은 주로 붉은 사암으로 건축돼서 정교하고 세밀한 부조 기법에 적합했을 뿐만 아니라, 석양이 질 때면 사원 전체가 장밋빛으로 물드는 장관을 연출한다. 더불어 건물 크기도 앙코르시대 건축 표준의 10분1 수준으로 작아서 애칭으로 “귀중한 보석” 또는 “크메르 예술의 보석”이라고 불린다.

반띠스레이 사원에서 앙드레 말로는 떼와다 여신상을 훔쳐 반출하려다가 프랑스 식민지 당국에 체포됐다. 그가 훔친 유물은 단순한 가치이상의 문화재급 보물이어서 왕실을 넘어 일반 국민에까지 공분을 크게 샀던 모양이다. 이에 따라 프놈펜 시내 호텔에 투숙하며 수개월간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긴 시간동안 옥고도 치렀던 것으로 전한다. 《좁은문》의 저자로 알려진 앙드레 지드를 비롯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구명운동으로 겨우 풀려나지만, 이때의 식민지 당국에 대한 반감은 그를 열렬한 반식민주의자로 변모시켰고, 그의 범죄행각은 소설 <왕도로 가는 길(La Voie royale, 1930)> 집필에 직접적인 참고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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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띠스레이 사원의 기둥 또는 벽면에 새겨진 떼와다 여신상과 드바라팔라 수호신상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유명세를 타게 된 반띠스레이 사원은 도굴의 위험과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앙리 마샬(Henri Marchal, 1876-1970)이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앙코르 유적 최초로 아나스틸로시스(anastylosis; 해체 후 복원) 공법을 사용해 복원을 진행했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부조의 예술성도 뛰어나 방문할 가치가 높다. 그러나 도둑질과 기물파손이 계속됨에 따라 20세기말에 일부 조각상은 복제품으로 대체됐다. 그런데 프놈펜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진 시바신과 그의 부인 우마 동상은 오히려 박물관측 과실로 파손됐다.

그러고 보니 관광객으로서 반띠스레이 사원을 방문하고 맞닥뜨렸던 가장 큰 아쉬움이 떠오른다. 인도 신화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에 무지했던 당시에 앙코르와트나 바이욘사원 등을 방문하며 그 위용을 감상하는 게 전부인 줄 알았다. 이에 반해 사람 키보다 조금 높아 보였던 반띠스레이 사원은 부조장식과 외벽마다 마치 만개한 꽃송이가 신화를 품고서 촘촘하게 박혀있는 듯했다.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꺼내보고 이야기에도 심취하고픈 욕구가 어찌 안 들까 싶었다. 그러니 더 오래 감상하고 싶어서 돌아서는 발길에도 계속 미련이 남았다./왕립프놈펜대학교 한국어학과 이영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