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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더 알아보기] 제60화 쭌낫 대사전과 크메르어 보존 운동(ខ្មែរនីយកម្ម; Khmerization)
▲ 스마트폰 앱을 통한 쭌낫 사전의 모습
크메르어 문헌자료에서 개념어를 정의하는 문장을 만날 때면 거의 항상 쭌낫 사전을 참조하여 단어의 유래와 의미가 설명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요즘은 스마트폰의 앱스토어를 통해서 크메르어 사전 앱을 검색하면 쭌낫 사전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앱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쭌낫 사전은 캄보디아의 대표적인 크메르어 사전으로, 1938년에 불교연구소에서 처음 출판된 이후로 현재까지 제5판 1967년본이 공인되어 널리 쓰이고 있다.
크메르어 사전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의 씨소왓 왕대(통치: 1904-1927)인 1915년부터 왕실 주도하에 어문학자들로 구성된 사전편찬 위원회를 통해 점차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쭌낫 스님은 초기 단계부터 타계 직전인 제5판의 발간까지 무려 53년 동안 사전편찬에 매진했다. 그의 노력과 의지 덕분에 식민지 치하에서도 크메르어의 보존이 가능했고,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로마자 표기를 사용하는 베트남과 비교해서 캄보디아가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쭌낫 스님은 1938년에 사전의 제1판 인쇄가 성공하면서 크메르어 사전의 창시자로 인정받으며, 캄보디아 불교의 양대 승단인 마하니까야 승단*의 제4대 최고 책임자인 승정(1948-1969)의 반열에 올랐다. 이외에도 지금까지 모든 행사마다 식전에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캄보디아 애국가 “노꼬리엇”은 국가적 정체성과 역사를 수호하려는 쭌낫 스님의 의지가 담겨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캄보디아인들이 자신들의 국기 앞에서 “노꼬리엇”에 열중하던 엄숙함은 쭌낫 스님의 정신과 염원을 닮았던 듯하다.
쭌낫(Chuon Nath) 스님은 1883년3월11일 깜뽕스프주의 농가에서 2남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2세에 껀달주의 사원에서 크메르어문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14세에 출가해서 21세에 정식으로 스님이 됐다. 이후 프놈펜의 운날라옴 사원(Wat Ounalom)에서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주변국 외국어에도 정통하도록 매진했다고 한다. 1915년에는 고등수준의 팔리어(Pali)학교 교사로 임명됐고, 1919년부터 크메르어 사전편찬 위원회 대표로서 사전편찬을 주도했다. 그밖에 크메르어 철자법 검토위원, 불교연구소 운영위원, 팔리어학교 교장, 운날라옴 사원 주지, 역사문건 검토위 의장, 국기 검토위 의장 등등을 역임했다.
캄보디아는 1863년8월11일에 노로돔 왕(통치: 1860-1904)이 프랑스 보호령을 동의하는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다. 이후 프랑스는 친프랑스 지식인을 통해 크메르어를 프랑스어로 대체하려 했고, 이러한 의도는 오히려 많은 캄보디아 학자들로 하여금 크메르어의 보존을 강화하도록 했다. 그중 쭌낫 스님은 프랑스 식민지배의 영향을 받던 불교와 크메르어를 지키기 위해 ‘크메르어화(Khmerization)’를 강조하며 외래어의 유입에 대항해서 말의 뿌리와 팔리어 및 산스크리트어의 조합으로 신조어를 창안하자고 주장했다.
쭌낫 스님의 ‘크메르어화’는 모든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전체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즉, 친프랑스 지식인들은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된 신조어가 편리하다고 여기지 않았고, 프랑스어 외래어를 그대로 수용하자는 입장이었다. 다만 크메르어 문자를 그대로 유지하는 정도에서 그의 주장이 일부 관철된 모양이다. 물론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아서 결국에는 1915년에 크메르어 사전을 편찬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에도 승승장구의 가도를 달리며 오늘날 캄보디아의 정신적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왕립프놈펜대학교 한국어학과 이영심교수
*캄보디아 불교의 승단은 1855년 이후 대중적이고 진보적 입장을 견지하는 마하 니까야(Maha Nikaya)와 태국왕실에 뿌리를 두며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는 담마유티카 니까야(Dhammayuttika Nikaya)의 2개 종파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