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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더 알아보기] 제51화 까엠 러이(Kem Ley), 살해당한 정치논평가
아무 문제없이 느긋한 평화가 감도는 듯한 이 세상도 실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캄보디아는 기존의 틀을 바꾸려는 측이 아무리 저항해도 유지하려는 측은 너무나 완고해서 일체의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유럽연합(이하 EU)은 최대 교역국의 지위를 이용하여 지난 2월12일, 캄보디아에서의 인권 및 민주주의 악화를 문제로 EBA(Everything But Arms; UN지정 세계 최빈국 48개국에 무기와 탄약을 제외한 모든 상품에 무관세와 무쿼터 혜택을 제공하는 제도) 특혜 일부를 철회함으로써 제재조치를 단행했다.
▲ 2016년6월30일, 생전에 까엠 러이 박사가 칼라혁명의 의미와 캄보디아에서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라디오에서 인터뷰하던 모습
까엠 러이(Kem Ley; 1970년10월19일~2016년7월10일)는 캄보디아의 운동가, 의사 및 정치 논평가였다. 그는 현 정부 여당 캄보디아국민당(CPP)에 대한 신랄한 정치적 논평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캄보디아인들과 전 야당인 캄보디아구국당(CNRP)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던 2016년7월10일 아침, 프놈펜의 한 커피숍에서 정치적인 동기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는 총격으로 사망했다. 이로써 그는 캄보디아에서 살해된 주목할 만한 활동가로서 2004년 노조지도자 찌어 위찌어(Chea Vichea), 2012년 환경운동가 춧 워티(Chut Wutty)의 뒤를 잇는다.
그는 따께오주 뜨람꼭지구 리어이보우면에서 출생했다. 1992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태국의 쭐라롱꼰대학교 연구학 석사과정을 진학했으며, 2008년에는 말레이시아의 말라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에 UNICEF와 UNAIDS가 지원하는 프로젝트의 따께오주 HIV 및 AIDS 연구원을 시작으로 UNDP, UNICEF, UNAIDS 등의 UN기구 컨설턴트 및 프로젝트 분석가로 일했다. 2015년6월에는 풀뿌리민주당(Grassroots Democracy Party)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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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당시 그는 2016년5월부터 10월까지 예정했던 “크메르 가족들과 함께하는 100일”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었다. 캠페인을 통해서 오늘날 캄보디아가 직면한 많은 문제의 근본 원인을 심도 깊게 찾아내고자 시골 주민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또한 Facebook 계정을 통해서 풍자적인 정치 기사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당시에 끝낸 19번째 에피소드에는 캠페인 동안의 기록과 “양의 탈을 쓴 늑대(Black Man in a White Shirt)”라는 고발성 짙은 내용도 담았다.
그는 불법 벌목, 국경 문제 및 부패에 대해서 정부를 비판했다. 특히, 암살당하기 며칠 전까지도 국내외 기자들로부터 훈센의 가족을 공격하는 내용의 ‘세계적 증언 보고서(Global Witness report)’에 대한 논평을 의뢰받았다. 해당 보고서는 “적대적 인수합병: 캄보디아 통치자 가족의 기업 제국”으로 그가 살해되기 전인 2016년7월7일에 발표됐다. 당시 그에게는 임신 중인 아내 보우 라짜나(Bou Rachana)와 네 아들이 있었다. 그의 부인은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 호주로 망명의지를 표명했었고 2016년8월에 캄보디아를 떠났다.
이후 검거된 용의자는 전직 군인으로 3천 달러가 넘는 부채 때문에 까엠 러이를 총살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애초에 두 사람은 만난 적도 없는 관계로서 그러한 부채는 존재할 수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대단히 정치적으로 영향 받은 것으로 여겨짐에 따라 국내외의 비난이 잇따랐다. 미국 국무부는 까엠 러이의 살인 사건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며 전면 조사를 요구했고 UN 역시 당국에 조사를 촉구했다. 빌 롱허스트 영국 대사는 그의 죽음을 “캄보디아의 심각한 손실”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 2016년7월24일, 까엠 러이 박사의 장례식 운구 행렬
2016년7월24일 장례식은 대략 2백만 애도객들이 그의 고향 따께오까지 운구행렬에 동참했다. 이는 왕실이나 정부 인사가 아닌 일반인으로서는 역사적으로 가장 최고의 장례식 인파였다. 2018년7월9일 2주년 행사 전날, 휴먼라이츠 워치는 정부의 살인사건 진상조사의 미온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UN과 국제사회에 정의를 촉구했다. 그러나 3주년인 2019년7월10일, 까엠 러이가 살해된 장소에 꽃을 헌화한 죄, 사법제도를 비난한 중죄, 그의 초상화 티셔츠를 판매한 죄 등으로 지지자들이 구속되고 까엠 러이를 추모하는 소소한 행사조차 금지됐다./왕립프놈펜대학교 한국어학과 이영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