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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더 알아보기] 제6화 스트롱맨
훈센, 그는 과연 캄보디아의 현존하는 대영웅이다. 그럼에도 일찍이 그는 뭍평민이 롤모델로 삼을 만큼 가진 것이 변변찮은 사람이었다. 그에 관한 소개의 어디에나 성장 배경 또는 학력은 구차스러울 만큼 짤막하다. 그런 그가 1985년 이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최장의 집권기간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특유의 자존심과 긍지는 캄보디아인의 기본 자질인 마냥 전세계를 상대로 아쉬울 것 없이 언제나 당당함을 과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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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8월5일, 깜뽕짬 주(현 뜨봉크몸)에서 출생, 당시 이름: 훈부날(1972년 개명) |
1970년4월4일, 크메르루즈(캄푸치아 공산당을 추종하던 무장투쟁 단체의 명칭)에 합류 |
그는 1952년8월5일(공식적으로는 1951년4월4일) 캄보디아 깜뽕짬 주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승려 출신으로 1940년대 프랑스 식민지 저항군으로 활동한 바 있다. 훈센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13세부터 프놈펜 사원에 거주하며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1970년 무렵 친미계열의 쿠데타로 노로돔 시하누크 왕자가 대국민 항전을 호소하자 훈센은 학업을 중단하고 크메르루즈에 합류했다.
1977년6월20일, 크메르루즈에 반기하여 베트남으로 탈영 |
1979년1월7일, 프놈펜 입성 및 베트남 괴뢰정권 수립 |
1979년~1986년, 외교부 장관 재직 |
1981년5월1일, 총선에서 캄푸치아인민혁명당(CPP전신) 1당 체제 수립 |
1981년~1984년, 부총리 재직 |
1985년1월14일, 총리 취임(33세, 세계 최연소 국가원수) |
1975년4월17일,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으로 입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한쪽 눈을 부상당했다. 이즈음 러브스토리도 결실을 맺어서 1976년1월5일 분라니와 결혼한다. 곧이어 베트남 국경을 소탕하라는 크메르루즈의 명령을 거역하고 캄보디아의 침공 계획을 베트남에 누설한다. 이에 1979년1월7일, 베트남의 역공으로 캄보디아에 베트남 괴뢰정권이 수립되고 헹삼린, 체아심 등과 함께 정권의 핵심에 선다.
▲ 1980년대초 훈센의 연설 장면
당시 훈센은 외교부 장관과 부총리직을 거쳐 1985년1월14일, 세계 최연소 총리에 취임하지만 베트남을 견제하는 국제정세와 국내의 반베트남 정서가 맞물리면서 1989년에 베트남군은 철수한다. 이후에 반베트남 그룹의 대표 시하누크 왕자와 1991년10월23일 파리평화회의에서 화해하고, 유엔임시행정기구(UNTAC) 주관아래 입헌군주국 수립을 목표로 1993년5월23일 총선을 치룬다. 그러나 결과는 왕당파 푼신펙당에 아깝게 패하고 만다.
▲ 1991년 입헌군주국의 부활을 축하하며 귀환하는 시하누크 국왕과 훈센 총리
1993년5월23일, 총선에서 푼신팩당에 대해서 58석 vs 51석으로 패배, 제2 총리 취임 |
1997년7월초, 훈센의 쿠데타로 제1 총리 축출 |
1998년/2003년/2008년, 총선에서 집권당(CPP) 승리 |
2013년7월28일, 총선에서 연합야당(삼랑시당+인권당)에 대해서 68석 vs 55석으로 승리 |
2018년7월29일, 총선 대승: 전체 의석(125석) 석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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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직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훈센은 시하누크 국왕의 중재 아래 노로돔 라나리드 총재를 제1 총리, 자신은 제2 총리로 하는 연립정부를 구성한다. 그러나 프랑스 정치학 교수 출신에다가 부왕의 후광으로 1980년대 정치에 입문한 라나리드 왕자는 행정 전반과 군부를 장악할 역량이 부족했다. 결국 1997년7월초 국왕과 왕자의 외유를 틈타 제1 총리의 수족들은 참혹하게 몰살당한다.
▲ 1993년 제1총리와 제2총리 모습
이를 쿠데타로 규정한 국제사회의 불안한 눈길을 잠재우려는 듯 훈센 총리는 국가 정상화에 주력했고 1998년 총선에 승리하면서 단독 총리 체제를 구축한다. 1999년에는 크메르루즈 지도부와 평화협상을 진행함으로써 국내외적으로 안정화에 기여한다. 다만 2013년 총선에서 제3 세계 국가의 ‘아랍의 봄’ 여파가 캄보디아 총선에도 영향을 주면서 연합야당(CNRP)이 약진하며 소속 정당인 캄보디아인민당(CPP)을 크게 위협한다.
이에 따라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들어 2017년 CNRP는 대법원의 해산 결정으로 혁파되고 소속 정치인들도 피선거권이 박탈됐다. 이듬해 총선은 CPP가 국회 전체 125의석을 석권함로써 국제사회와 민주주의 세력에게 정권교체의 희망을 불식시켰다. 그리고 오늘날 캄보디아 국민들은 훈센 총리로부터 2028년까지 집권하겠다는 고집스러운 열망을 공개적으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이영심
▲ 오늘날 훈센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