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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칼럼] 지네의 신발
몇 안 되지만 좋아하는 집안일 중 하나가 구두 닦기다. 부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때깔이 형편없어진 구두라도 쓱쓱 몇 번만 문질러 주면 반짝반짝 광이 나는 게 품을 들이면 금방 보상을 안기는 일이다. 캄보디아 특유의 붉은 진흙이 덕지덕지 엉겨있고 톱밥에 페인트 자국까지, 건축쟁이의 구두를 닦는 일은 소위 말하는 가성비 최고의 노동에 해당할 테다. 그날 현장의 공정이 무엇이었는지 또한 단박에 알 수 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봤는지 다른 책자에서 봤는지 기억이 흐릿하지만,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그림 <낡은 구두 한 켤레>를 처음 봤을 때의 기억만큼은 뚜렷하다. 칙칙한 황토 배경에 누군가와 오랜 세월 고락을 함께한 닳고 닳은 구두 한 켤레 정물(靜物). 예술에 대해, 특히 회화 분야에 거의 무지했던 시절, 잘 그렸다 못 그렸다 차원을 넘어 최초로 묵직한 울림을 준 작품이었다고 할까. 당시 내 빈곤한 상상력에 의하면 신발의 주인은 군복을 물들여 입은 우직한 날품팔이 남자로 밥벌이의 고단함과 가난의 누추함 이면에 노동이 주는 든든함, 부양의 따스함 같은 느낌을 받았다. 1886년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옮겨 작품 활동을 한다. 몽마르트르의 가난한 화가는 어느 날 벼룩시장에서 헌 구두를 구입하는데 누군가의 고단한 삶이 담긴 볼품없는 구두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 게 이 명작의 탄생 배경이다. 작품이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나고 나면 작가 의도와 상관없이 해석은 독자의 몫이 된다. 신발을 보면 성별, 신분, 취향은 물론 직업, 나이, 걸음걸이까지 가늠할 수 있다. 신발은 주인 행보가 만든 발의 거푸집처럼 주인의 흔적, 일테면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시대는 신발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기에 역부족이다. 이동, 노동, 운동을 망라해 신발 한두 켤레로 때우던 시절은 옛날이 됐다. 정장용, 캐주얼용, 파티용에 등산화, 골프화, 테니스화, 웬만한 현대인의 신발장엔 신발이 차고 넘친다. 패션과 용도에 맞춰 드문드문 착용할뿐더러 유행주기 또한 짧아 주인의 발을 각인하기 전에 폐기처분되기 일쑤다. 다리가 백 개인 지네가 백 개의 신발을 사는 동화가 생각난다. 아기 지네가 길을 가다 발을 다친다. 신발을 안 신어서 다쳤다고 생각한 엄마 지네가 신발을 사서 신긴다. 신발만 신었다가 발이 부르트자 이번엔 양말을 신긴다. 발이 백 개다 보니 양말 신는 데 한나절 신발 신는 데 한나절, 정작 외출 한 번 못해보고 하루가 다 가버린다는 얘기다. 정교해진만큼 번잡스러워지고 비능률적이라는 면에서 현대문명은 여러모로 지네의 신발과 닮았다. 층층시하의 보안시스템만 보더라도 안전 확인 절차를 밟느라 목적지 근처에도 못 가서 탈진해버리곤 하니.
어쨌거나 출근길 구두 닦아주는 일은 즐겁다. 일터로 향하는 신발의 일발장전 된 총알 같은 느낌도 좋고, 가장 낮은 곳까지 기꺼이 배려해 준다는 으쓱한 기분도 좋다. 구두가 가정에서 세상 밖으로 이끄는 매체라서 일까, ‘막다른 길일랑 맞닥뜨리는 일 없이 햇살과 웃음 넉넉한 길 따라 다니다가 변함없이 돌아오기를!’ 기도라는 것이 절로 우러나오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나순(건축사, UDD건설 naarc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