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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칼럼] 어느 하잘것없는 새해 결심
“2018년을 맞아 무료 나눔 합니다. 나이가 너무 많아 나이 나눔 합니다.” 나이를 먹어오면서 먹어치운 음식 그릇을 어림해보니 작은 피라미드 하나쯤 쌓고도 남음직한데 인심을 쓸 수 있는 게 나이밖에 없다니, 인생무상이 따로 없다. 해가 바뀐다고 뭐 그리 달라질까. 그럼에도 12월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느낌이라면, 1월은 “2018년”이란 새로운 타이틀과 함께 새로 상영되는 느낌이다. 감독은 나 자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절이 언제던가,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인생을 주무르고 있지 않나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게 된 게 그동안의 변화라면 변화일 테다.
명망 있는 미래 학자들의 예측에 따르면, 평균수명이 120세에 이르는 2070년쯤에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결혼을 두세 번 이상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결혼-이혼-재혼-재이혼-재재혼…, 대체로 시간차를 둔 일부일처제 형태를 유지하면서 결합유형도 지금보다 다양해지리라는 전망이다. 수명이 느는 탓도 있지만 상상하는 것은 뭐든 만들어내는 첨단 유혹시대에 쾌락 유통기한이 짧아짐에 따라 사랑의 유통기한 또한 차츰 단축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과 한두 세대 전만해도 연인 손목 한번 잡아보려고 기나긴 탐색전을 벌이며 책 한 권을 엮어낼 만큼의 연애편지를 쓰기도 했건만. “사람들은 연애에서 정액보다 훨씬 많은 잉크를 쏟아냈다”는 옛 문사의 기록이 있듯이.
미래학자들이 예측한 그 미래가 벌써 와 있는 듯하다. 요즘 황혼 재혼이 급증하고 재재혼도 드물지 않다. 여성 지위가 높아지면서 ‘여성재혼 + 남성초혼’ 커플이 반대의 경우를 앞지른 지 오래라고 하니, 결합유형 따위를 따지는 건 이미 구태인 듯싶다. 그 동력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동성끼리 있을 때보다 남녀가 섞여 있을 때 즐거운 긴장으로 들뜨게 되는 현상은 나이와 무관한 모양이다. 사랑할 때만큼은 세상에 관대해져 사랑이야말로 인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들 하니, 노년까지 이성에 대한 설레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인류를 위해 다행스런 일이다.
20세기 지성을 대표하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일흔넷의 나이로 죽기까지 1년 동안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 왜소한 사팔뜨기 추남으로 사람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도록 웃기는 특유의 재치와 익살은 전설적이었지만, 이미 시력을 잃고 식사조차 혼자 하기 힘든 상태인 그에게 신문 지상에 공개한 연애편지가 날아들었다. 그보다 삼십 년 아래인 프랑스 대표적 여류작가 사강. 사춘기 시절 처음 사르트르 책을 읽고 푹 빠져 30년을 흠모한 끝에 이루어낸 사랑이다. “그는 내 정신을 사로잡았다… 그에게 몰래 위스키를 가져다주는 것, 그와 함께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사강의 회고다. 쾌감 중에 지적 쾌감이라는 게 있다. 사강은 사르트르의 재담에 매료된 게 틀림없다. 최근 섹시 코드인 ‘뇌섹 시대’와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역시 나이를 초월하는 섹시함이란 명민함에 있지 않나싶다. 콘텐츠가 풍부한 사람이 늘그막까지 사랑 받는 모양이니, 느느니 나이밖에 없는 새해부터는 신경 좀 써야할까 보다. /나순(건축사, UDD건설 naarc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