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누드(Nude)

기사입력 : 2017년 07월 07일

섹스, 스크린, 스포츠, ’3S’ 정책을 펼치던 5공화국 시절엔 스트립쇼가 성행했다. 야근을 마친 시간대에 평범한 스탠드바 같은 데서 생각지도 않게 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같은 여자입장이라 그랬는지, 특유의 조명과 음악에 맞춰 한꺼풀씩 벗어던지는 퍼포먼스에서 어떤 인생의 단면을 보는 듯했다. 외설과 예술의 경계란 흐릿할 수밖에 없지만 외설이라면 ‘흥분’을, 예술이라면 ‘감동’을 일으킬 터이다. 자극의 정도는 그 시대 인습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층층 싸매고 살았던 서양의 중세나 동양의 유교시대엔 여성 종아리만 보아도 흥분 했지만 바야흐로 웬만한 노출엔 끄떡 안하는 시대가 되었다. 예술의 영역이 넓어진 건가?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벗은 몸에 대해 여러 장르에 걸쳐 끊임없이 표현해 왔다. 특히 서양 누드예술의 역사는 유구하다. 한창 예민하던 학창시절 미술책을 펼쳤을 때 겸연쩍었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터이다. 조각이나 회화나 어쩌자고 교과서에 벌거벗은 작품을 그렇게 많이 실어놨는지… 서양미술사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의미 있는 그림’을 주로 그리게 된다. 신성한 사랑, 속된 사랑, 절대 진리, 세월의 허무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의인화하여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야릇하게 서있는 여인과 옷을 갖춰 입고 얌전하게 앉아있는 여인 중 누가 신성한 사랑을 의미하겠는가?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나신의 여인이 신성한 사랑을 뜻한다. 누구나 태어날 때 그렇듯 신이 처음 인간을 창조했을 때는 벌거숭이였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은 원래 나체촌이었지만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후부터 몸을 가리게 되지 않았던가. 예술사의 거장들치고 누드를 다루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그들이 알몸에 집착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인위적인 장치인 차림새를 배제한 누드(nude)야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신의 완벽성을 반영하는 거울로 여겼다. 예술이 추구하는 여러 가치들 중 가장 핵심적인 주제다. 존재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소재란 다름 아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우리 몸인 것이다.

캄보디아에선 진정한 누드를 연출하기 힘들다. 사철 강한 태양광 탓에 평상시 삶의 패턴이 알몸에까지 드리워지는 까닭이다. 섭외를 받은 누드모델은 자연스런 몸태를 위해 며칠 전부터 속옷 없이 지낸다고 하는데, 캄보디아 햇볕흔적을 단기간에 없애기란 어림없다. 야외활동이 잦은 여자들은 누드가 돼도 누드로 봐주기 힘들다. 뚜렷한 속옷자국에 마치 비키니를 입은 듯해서다. 게다가 시계에 샌들자국까지. 남자들 중 땡볕에 노출돼 일하는 화이트컬러 또한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다(일테면 건설현장 같은 곳, 나의 유일한 동거인이 여기 포함된다). 셔츠의 옷감이 여러 겹 겹치는 부분, 요컨대 칼라를 따라 앞섶으로 이어지는 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Y셔츠’의 Y자 선형이 선명하다. 발목 부분은 또 어찌나 허연지. 무슨 목줄에 발 체인까지 채운 것 같은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조금은 서글픈 느낌이다. / 나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