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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칼럼] 감정 적출(摘出)
주변이 떠나가라 왁자하게 어울리는 젊은 축의 술자리를 보노라면, 이십년도 지나지 않아 이들 중 몇몇은 망가진 신체 장기 하나쯤 떼 내고 주변눈치를 살피며 술잔을 만지작거리지 않을까 싶어진다. 나이 들면서 좋은 점이 별로 없는 게 이런 싱그러운 정취에서조차 시니컬한 생각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세월 앞에 무엇이든 덧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순간순간의 즐거움에 가치를 더해주기도 하지만.
캄보디아가 아직 의료 후진국이라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한국행을 택할 수밖에 없다. 거짓말이 아니라 우리 연배에 한동안 귀국했다가 해쓱해서 돌아왔다 하면 장기 하나 둘 솎아내고 온 경우가 흔하다. 사람들은 고통조차 시새워 자랑하게 마련이라 누군가 이번에 나가서 갑상선을 제거했다고 고백하면 누군가는 자궁을 없앴다하고, 누군가는 쓸개를, 누군가는 신장을, 누군가는 난소를 떼면서 맹장은 덤으로 뗐다고 너스레까지 떤다. 의료기술 덕에 생명연장이 가능해진 현대인 대부분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신체 결손의 시기를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빈 자궁의 “빈궁마마”가 되고, 말 그대로 “쓸개 빠진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없어도 생명에 지장 없는 기관이 있는가하면 심장처럼 현대의학으로도 수습 불가능한 기관이 있다. 영화<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몇 해 중증 심장병을 앓던 아버지가 죽음을 맞는다. 얼어붙은 땅에 장례를 치를 수 없어 봄이 올 때까지 시신은 냉동실에 보관된다. 고교생인 아들은 아버지를 여의고도 여자 친구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밴드연습에 열을 올린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 이어지지만 어쩌다 냉동닭고기가 눈에 띄면 히스테리를 부린다. 봄을 기다리던 어느 날 냉장고문을 열다 냉동 포장육들이 우르르 쏟아지자, “아빠가 냉동고에 있는 거 싫어”라며 오열한다. 아무렇지 않게 버텨나가는 듯했지만 피붙이를 잃은 상실감이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뼛속깊이 사무치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마음은 신체의 어떤 기관에 해당할까. 진화심리학자들의 ‘신경 구성주의(Neural Constructivism)’에 따르면 뇌가 외부정보를 이용해 마음이라는 복잡한 회로를 구성한다는데, 그렇다면 마음은 뇌에 속하는 것일까.
서울 한강공원에서 올해로 네 번째 ‘멍 때리기’대회가 열렸다. 바쁜 현대인의 뇌를 쉬게 해주자는 취지의 대회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오래 유지하기’가 규칙이다. 참가자들의 심장박동을 측정해 90분 동안 가장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 사람을 가려낸다. 일종의 마음을 비우는 수행이다. 늘어만 가는 정보량과 더불어 자기계발 과잉, 자아실현 과잉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뇌. 우울이나 불안, 절망 따위 뇌 속 감정단자를 외과수술로 제거해버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슬픔 같은 감정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감정 관장회로가 수없이 존재한다니, 언젠가는 삶을 좀먹는 악성 감정종양에 대한 회로만 선별해 적출(摘出)해내는 ‘명랑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나 순 (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