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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 칼럼] ‘빠’ 정치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이 한 문장이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 뉴욕타임스는 ‘한국 민주주의의 진화’와 ‘박정희로 대변되는 구질서의 종언’ 두 키워드를 뽑아, “평화적 시위로 대통령을 퇴진시킨 일은 한국이 구미수준의 민주주의에 도달했음”을 나타낸다고 보도했다.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한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은 국민이 원할 때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고 썼다. 우리 국민은 스스로의 힘으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대통령을 축출해냈다. 무소불위 독재 권력에 총구를 들이댔던 10.26 사태의 총성 이후 38년만이다.
매 주말 수십만이 촛불집회를 이어가는 장관을 지켜보면서 과연 인용이 될까 싶은 적이 많았다. 오랜 적폐인 정경유착 시스템이 철옹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만장일치로 인용이 됐는데 1987년 6월 항쟁과 많은 부분 겹친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박종철 이한열 학생의 사망에 이어 전국 동시 다발의 봉기 끝에 직선제를 끌어냈고, 세월호 학생들을 수장시킨 이후 전국 각처의 촛불시위 끝에 역사상 처음 대통령을 탄핵시켰으니.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직선제 선거에서 12.12쿠데타와 광주학살의 주범을 대통령으로 뽑아 준 ‘어처구니없는 역사’까지 반복되면 어쩌나 염려스러울 따름이다.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이루어낸 프랑스 혁명도 100년 가까이 왕정복고를 반복하지 않았던가.
헌재 탄핵심판을 통해 대통령의 ‘무능’은 탄핵사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소추사유 중 하나인 세월호 사고 당시 구조 실패는 대통령의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무능’이 대통령 파면 사유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무능한 대통령에 대한 책임은 투표권을 행사하는 국민의 몫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진부하지만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게 마련 아니던가. 누군가 이번 촛불혁명을 지켜보면서 이토록 이성적이고 품격 있는 국민이 이토록 몰상식하고 저질스런 정부를 가졌다는 건, 21세기 세계사에 기록될 미스터리라고 했다. 그러나! 여론몰이, 야권분열, 지역감정, 금전살포 따위를 이용한 해묵은 정치공작에 넘어가 민주주의 물꼬를 되돌려놓았던 6월 항쟁 직후 선거를 생각하면…
“대선주자 중 단연 ‘안철수’에게 끌린다. ‘순’이는 당연 ‘철수’지 ! 똑똑하지, 잘생겼지.” 물론 우스개지만 이런 근거 없는 맹목적 지지가 시쳇말로 ‘빠’다. 일말의 분석과 비판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추종이다. 바라건대, 이번 대선부터 유치한 ‘빠’ 정치 좀 끝내자. 임기 없는 권력인 재벌과 언론의 소위 ‘주연’ 바꾸기, 또다시 적폐세력의 공작에 휘둘려 우리 손으로 면죄부를 안겨 줌으로써 역사적인 촛불 명예혁명을 무위로 돌려버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호감이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감성의 문제라 할 수 없지만, 국가의 통치자를 선택할 때는 “싫고, 좋음”보다 “무능, 유능”을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나 순 (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