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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 칼럼] 오수(午睡)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고 유명세를 타자 쏟아지는 강연요청에 연일 녹초가 됐다. 보다 못한 운전수가 같이 순회강연을 다니는 동안 상대성 이론을 거의 외웠다며 자신이 대신 연단에 오르겠다고 나섰다. 우연히 외모까지 닮은 데다 말투며 표정이며 가짜 아인슈타인이 감쪽같이 강의를 해냈다. 어쩌다 전문적인 질문이 들어오면, “그 정도 수준이라면 제 기사도 알고 있습니다. 여보게, 잘 설명 드리게나.”, 운전사 복장으로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인슈타인에게 바통을 넘기면 그만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하루 10시간 이상 자는 대표적인 ‘long sleeper’다. 수시로 낮잠을 잔 것으로도 유명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살바도르 달리, 토머스 에디슨처럼 창의적인 사람 중에 낮잠 자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많다. 깨어있을 때 풀리지 않던 문제가 용케 꿈속에서는 풀리곤 한다던가.
아인슈타인과 나의 유일한 공통점은 낮잠족이다. 학창시절엔 책상에서, 직장 생활할 땐 제도판에서 기를 쓰고 쪽잠을 잤는데 이제 주부특권으로 침대에서 잔다. 오래 동고동락을 하다 보니 버릇의 평준화가 됐는지 낮잠이라곤 모르던 남편과 종종 나란히 누워 오수(午睡)를 즐긴다(대낮에 잠깐 들렀다 나가는 남편을 배웅하다보면 생전 안 해본 첩질이라도 하는 느낌이다). 밥숟가락만 빼면 배터리 방전이라도 된 듯 널브러져 자는 캄보디아 건설판의 낮잠문화 덕으로 이곳에서 누리는 호사 중 하나다. 아직 죽어보진 못해서 모르겠지만 죽음을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비유하곤 한다. “당신은 그림을 그리고 나는 수를 놓아 살면, 반주를 곁들인 밥상에 마주앉아 시를 지을 수 있는 돈벌이야 되겠지요.”라던, 먼 옛날 어느 이름 없는 화가의 착한 아내로 사는 꿈을 꾸다 깨어나지 못한다면 그런 죽음도 그리 나쁘지 않을 듯싶다. 어김없이 깨어나, 매달 밀려드는 각종 고지서에 아이들 등록금 철이 닥친다는 현실을 떠올리면 눈을 흘길 수밖에 없게 되지만.
낮잠을 뜻하는 ‘시에스타(Siesta)’는 스페인어로, 해 뜨고 여섯 시간이 지난 때를 가리키는 라틴어 ‘hora sexta’에서 파생됐다. 낮잠풍습이 고대로마에서 비롯되어 지중해 연안, 라틴아메리카 일대, 필리핀 중국의 열대지방, 중동 국가들로 퍼졌으리라 추측한다. 연구에 따르면 낮잠을 권장하는 문화권이 북아메리카 사람들보다 스트레스 지수와 심장질환 발병률이 낮다. 의학적으로도 낮잠이 뇌를 정화해 불필요한 정보를 제거함으로써 당일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산업혁명이후 생산성에 밀려 낮잠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멕시코에 이어 스페인도 시에스타 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렀으니. 노세 노세하는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캄보디아지만 몇 해 사이 도심에서 해먹을 걸고 태평스레 낮잠 즐기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브레이크 대신 엑셀레이터만 밟아대는 자본의 작동원리에 따라 임금 상승과 함께 노동 강도 또한 높아진 탓이리라. 과연 문명이 개인의 행복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