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개(犬)와 나

기사입력 : 2016년 08월 02일

대부분 단독주택에서 살았던 예전엔 대문에 <개조심>이라고 써 붙인 집이 많았다. 요즘 가짜 <CCTV설치>처럼 개를 기르지 않는 집이라도 도둑을 위협할 목적으로 팻말만 내걸기도 했다. 미국출신 변호사 ‘제프리 존스’의 책 ‘나는 한국인이 두렵다’에 보면, 저자가 집집마다 다니며 전도하던 선교사 시절 얘기가 나온다. 대문에 붙여진 <개조심>이란 팻말을 보고 당연히 문패일 거라 생각하여 용감하게 대문을 두드린 다음 큰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개조심씨 계십니까?”

늑대의 변종인 개는 인류가 최초로 길들인 가축으로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잘 되는 동물이다. 늑대에서 분리되어 사람과 어울려 살며 여러 대를 거치는 동안 친밀하게 구는 개체가 생존에 더 유리해 자연선택 됨으로써 인간에게 의존적인 품종으로 진화했으리라 추측한다. 그들은 자신을 팽개치고 떠나도, 고기로 팔아넘기기 위해 짐짝처럼 던져도, 도살 전 사슬을 채우고 몽둥이질을 해도 사람 눈에 들기 위해 꼬리를 흔들어 댈 정도로 인간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 고양이가 무신론자라면 개는 신앙심 깊은 유신론자라고나 할까. 보살펴주는 사람을 절대 신으로 인식하게 되면 그 외인에게 광신적인 박해를 해대는 걸로 보아 유일신교 쪽일 듯싶다. 어쨌거나 개는 우리와 달리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회의하는 사랑이 아닌, 조건 없이 사랑을 퍼붓는 동물임에 틀림없다.

캄보디아 어디서나 개를 만날 수 있다. 방목하거나 방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번듯한 동네에선 ‘쁘로얃 츠까에 까잊(사나운 개조심)’이란 경고와 함께 커다란 개사진이 걸려있는 집도 눈에 띈다. 앙증맞고 세련된 개를 안고 당당하게 활보하는 여인들이 선진국의 상징이라면 꾀죄죄하고 험악하게 생긴 개떼가 길거리 쓰레기통을 뒤지는 게 캄보디아 같은 개도국의 흔한 풍경이다. 문명화에도 단계가 있는 셈이다. 캄보디아 개는 생김새부터 야생늑대와 집안반려견의 중간쯤 돼 보이는데다 사람을 심각하게 해코지하는 사고가 빈번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저마다 말 못할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천국의 백성은 무엇보다 위장이나 생식기는 갖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먹고사는 일이나 욕망의 문제도 큰 고통이지만 나의 천국엔 개(Dog)가 없어야 한다. 그만큼 나는 개가 싫다…기보다 무섭다. 농담 아니다(하필 남편조차 58년 개띠를 만날 게 뭐람). 개의 등장만으로도 그나마 있던 품위를 다 잃고 비명과 함께 주인장을 불러대며 의자 위나 책상 위로 뛰어오르는 등, 전문용어로 ‘지랄도 가지가지’ 해버린다. 오죽하면 이 연식이 되도록 초대를 받으면 “집에 개 있어요?” 확인부터 하겠는가. 동물 공포가 유전적인 요인도 작용한다는데 친동기간 대부분 비슷한 처지다. 타인의 고통은 그게 내 몸에서 일어나지 않는 한 정확하게 헤아리기 힘들다. 상식적인 종류가 아닌 경우엔 웃음거리로 비치기 일쑤고. 개가 득시글득시글한 캄보디아에서 살자니 말 그대로 ‘개고생’이다.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