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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 칼럼] 우리 동네 음악, 남의 동네 음악
아들의 사춘기를 처음 눈치챈 건 초한지楚漢志 얘기를 할 때였다. “한나라 유방은…”, “항우에 맞서 유방이 말이야…” ‘유방’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안색이 변하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등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아들의 진짜 사춘기는 헤비메탈에 빠지면서부터였던 듯싶다. 저작권이 없는 캄보디아에 처음 왔을 때 해적판 CD 파는 곳이 많아 신나서 구입하려는데 녀석이 격하게 반발했다. 음악 마니아로서 제값의 정품 음원을 사는 건 기본 아니냐며 인세수입이 없어 굶어죽는 뮤지션 운운하다가 눈물까지 보이는 바람에 모두 뜨끔했다.
우리가 살면서 사랑하는 것의 대부분은 쓸모없는 것들,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마이너한 음악, 지질이 못생긴 고양이, 생산성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여자에게 마음을 뺏기기 십상이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초한지 중 ‘사면초가’의 유래가 됐던 대목은 유명하다. 오랜 전쟁 끝에 초나라가 한나라에 포위당한 밤, 정적을 깨고 사방에서 구슬픈 초나라 노래가 들려오자 심신이 지친 초나라 병사들이 향수에 젖어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가거나 투항하기에 이른다. 문학, 미술 같은 예술이 그렇듯이 음악 또한 ‘영양가 없는’ 짓으로 치부되기 일쑤지만 고향 노래가 군인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무장해제 시켜 결국 전쟁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라고 할까.
감각 중에 청각이 가장 보수적이라더니, 젊어서 듣던 노래와 함께 늙어가는 느낌이다. 캄보디아 생활도 제법 오래됐지만, 주술사의 요령소리처럼 무한 반복되는 캄보디아 행사음악엔 결코 친숙해질 것 같지 않다. 성악가 조수미가 불렀던가, 얼핏 들은 <꽃밭에서>가 며칠째 귓전에 맴돈다. ‘꽃밭에 앉아서/꽃잎을 보네/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아름다운 꽃이여’ 이 가사는 조선 세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최한경(崔漢卿)이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어릴 적부터 사모해오던 고향 처자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에서 비롯되었다. 하루키는 “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며 음악의 실용성을 얘기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하는 듯싶다. 옛 노래를 들으면, 호기 좋게 떠나왔던 고국에서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상념과 이방인으로서 앞날에 대한 불안이 마음을 흩으려놓기도 하는 것이다.
음악취향은 좀체 바뀌지 않지만 연령대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기도 한다. 예전 설계실에 근무할 때 사무실 배경음악을 놓고 세대 간 갈등을 빚곤했으니. 세월이 흘러 흘러 결국에는 태교음악에서 합의점을 찾았다. 클래식에서 크로스오버까지, 근무소음도 커버되면서 업무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잔잔하게 편곡된 곡들이다. 창작을 산고에 비유들 하니까 일맥상통하려나. 어쨌든 점점 여백이 있는 음악에 끌린다. 음악도 그렇지만 사람도, 인생도 널널한 편이 싫증이 덜해서 좋다. 늙었다는 증거라 해도 할 수 없다.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