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총량의 법칙

기사입력 : 2016년 07월 20일

코끼리와 쥐는 같은 포유류라도 여러모로 다른 동물이다. 집채만 한 덩치의 코끼리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반면, 조막만한 쥐는 부산스럽기 이를 데 없다. 코끼리의 수명은 70년, 쥐는 1년 내외다. 그럼에도 코끼리와 쥐의 일생동안 뛰는 맥박 수는 비슷하다. 총 8억 회 정도. 수명 차이가 70배에 달하니 쥐의 심장도 그만큼 빨리 뛸 터이다.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지구 대부분 동물들은 평생의 심장박동수가 비슷하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일들이 명을 재촉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릇 동물이 평생에 걸쳐 하는 일의 총량은 대동소이하다는 얘기다.

영화 단체관람료가 20원씩 하던 학창시절 <연산군>을 보았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역시 베드신이다. 노비출신의 일개 후궁인 장녹수가 저고리 앞섶을 풀어 헤치고 “아가, 에미에게 오련…” 연산군을 아기 대하듯 하자, 극악무도한 폭군이 응석받이로 변해 젖먹이 시늉을 하며 녹수의 품으로 파고든다. 어려서 비명에 간 어머니(폐비윤씨)의 사랑에 목말라하는 연산군, 그가 희대의 폭군이 된 원인으로 모정결핍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감독의 해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정상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일정량의 모정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인생의 많은 부분 총량이 정해져 있는 듯하다. 한 때 김두식 교수의 <지랄 총량의 법칙>이 회자됐다. 평생 떨어야 할 ‘지랄’에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로, 제 때 지랄을 떨지 못하면 자라서 ‘애어른’이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 누리지 못했던 장난감, 오락, 의복 따위를 나이 들어 경제력을 갖게 된 후 누리려는 층을 일컫는 키덜트(아이kid+어른adult)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젊어서 연애를 못한 사람이 늘그막에 바람나 망신살 뻗치는 경우처럼 연애에도 총량이 있는 듯하고, 간질환을 앓고 어느 날 갑자기 금주 전도사로 돌변해 사람을 놀라게 하는 주당을 보면 술의 총량도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내심 돌아온 탕자 타입에 더 끌리는 이유가 산전수전 다 겪어 더 너그러울 것 같은 느낌도 그렇고, 덜떨어진 짓의 총량을 채웠을 터이니 철들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회 구성원에도 총량의 법칙이 적용되는 듯하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문명사회의 요구를 이해하고 충족시키는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크든 작든 공동체의 구성원은 거칠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으리라. 하나를 보고 열을 파악하는 사람, 하나를 체험한 후에야 터득하는 사람, 하나를 고스란히 손에 쥐어줘도 모르는 사람. 어느 사회나 첫 번째 유형은 소수이고 대부분 나머지 유형에 속한다. 일테면, ‘얼간이 총량의 법칙’이 존재한다고나 할까. 요즘 지구촌을 뒤흔드는 미국의 트럼프 현상이나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을 보노라면 누구에게나 일인일표 권리가 주어지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는 듯한 게, 버나드 쇼의 말이 생각난다. “다수결 원칙이란 머리 좋은 쪽이 머릿수 많은 쪽에 눌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평화롭게 받아들이자는 것에 불과하다.”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