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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이 보는 세상] 신요크
0시를 막 넘기며 프놈펜 국제공항을 이륙해 5시간여를 날아 아침녘 인천 공항에 도착한다. 고국 내음 느낄 새도 없이 서너 시간만에 항공기를 갈아타고 14시간쯤 항행(航行)하여 케네디 국제공항에 내린다. 비행으로만 20여 시간 중간에 잠깐 육지에서 쉰 것 더해 도합(都合) 하루 꼬박 소비했음에도 날짜 변경선 덕에 같은 날 정오 무렵 USA 땅에 내렸으니 봄 무르익는 5월 말 어느날의 일이다.
돈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 되었다지만 한국의 국격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다. 중산층이라 자칭하기 어려운 백면서생(白面書生)이 언감생심 미국으로 마실을 간다는 건 꿈꾸기 힘든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오늘의 캄보디아에 대입해 보면 그들 서민들이 외국에 나가기 지난(至難)한 현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케네디 공항은 세계에서 항공기 발착이 가장 많은 곳이라니 가히 지구 마을 중심이라 할 만하다. 위치는 뉴욕 주 남동부인데 오늘날 뉴욕은 행정 수도의 자리를 넘겼다지만 아직도 경제적 문화적 수도라 해도 과언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 뉴욕에 내가 발 디디고 선 것이었다.
공중에 떠서 보내는 14시간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가부좌 틀어 도를 닦는 심정으로 영화 보기에 몰두하는데 마침 대공황 전 뉴욕을 배경으로 한 ‘위대한 개츠비’가 눈에 들어온다. 1925년에 발표되어 미국 대표작의 하나가 된 동명의 소설을 원본으로 한 작품이다.
화려한 파티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시종일관 사치(奢侈)의 끝을 만끽하는 뉴욕 부유층을 보여준다. 빈곤층에서 신분 세탁해 부자 계층에 진입한 개츠비는 주말마다 파티를 열어 부를 과시한다. 그 엄청난 비용을 쓰는 목표가 단지 가난 때문에 놓쳤던 아름다운 여인을 손에 넣기 위한 것이란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낭비(浪費)를 초래하는 순애보적 노력이 정녕 ‘위대한’ 가치란 말인가.
기차를 갈아타기 위하여 뉴욕 역에서 내린 김에 잠깐 지상으로 올라 보았다. 어린 시절 말로만 들었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저거렸다 짐작하며 마천루(摩天樓)들을 감상한다. 하지만 고층 빌딩들은 어느덧 한국에도 넘쳐나니 관심 잠시 뿐, 다음 순간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뚱뚱하다는 표현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을 비대(肥大)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한 미합중국은 지명을 통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보스톤 행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뉴’가 붙은 역 이름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개중에는 ‘뉴런던’역도 있다. 그러니 뉴욕은 ‘요크’ 지역에 ‘뉴’를 붙였으리라 가늠해 보게 된다.
하지만 실상은 이곳을 점령할 때의 영주(領主)인 ‘요크’ 공작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어떻든 ‘뉴’를 붙이는 경향성에 의하면 영국인들의 땅과 다른 새로운 곳임을 의미한 것은 동일해 보인다. 나는 그러한 작명에서 기존 식민 모국과의 차별화 의도를 읽는다. 그리하여 기왕 최강대국 미국에 온 김에 통 크게 엉뚱한 상상력 발휘하며 내가 부여한 ‘요크’의 상징 의미는 새롭지 못한, 즉 ‘나태하고 정체되고 비만(肥滿)한 그 무엇’ 쯤 되시겠다.
상상(想像)컨대 신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보다 순수한 뜻을 지녔었을 것이다. 청교도 정신에 입각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므로 정체된 모국보다는 무언가 새로운 땅을 꿈꿨을 것 같다. 그 꿈이 이름에 투영되어 부근 지역 명칭의 접두(接頭)에 온통 ‘뉴’를 남긴 것이리라.
영어 ‘new’를 우리말로 옮길 때 ‘새’나 ‘새로운’으로 해도 되지만 ‘신(新)’으로도 가능하다. 그러기에 ‘newspaper’를 ‘신문(新聞)’이라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新聞’이라 한자로 써도 되고 한글만으로 ‘신문’이라 써도 문제가 없는 말과 글을 지녔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주인들은 영국 본토의 단점들을 배제하고 좋은 점들만을 옮기려 지역명에 ‘뉴’를 붙였으리라. 초기 정착민들은 그 이상을 따라 활동적인 생활상을 살아가던 군살 없는 사람들이 다수였으리라. 그런데 영화 속의 개츠비와 주변 인물들처럼 자제력을 잃고 ‘위대하게’ 먹어댄 기름진 행위가 오늘의 비만한 군상(群像)을 부른 건 아닐까.
그들이 벗어나고자 했던 ‘요크’는 새로움보다는 나태함에 젖은 세상이었을 터이다. 사람이란 기존 관습에 찌들어 안주하는 순간 살이 오르고 둔해진다. 그것을 벗어나자고 ‘뉴요크’로 온 것인데 영화의 장면대로라면 벗어나고자 했던 ‘요크’의 세계로 다시 회귀해 버린 셈이다. 한국에서도 비만이 심각한 문제 되는 오늘날 한국 또한 신분 상승이 가능하던 건강한 사회를 지나 양극화가 굳어지는 구태의 ‘요크’가 되어가는 듯 싶다.
비만이란 단 하나의 요소에 근거했기에 다소 거칠었으나 그 잣대로 바라볼 때 캄보디아는 오히려 행복하다 볼 수도 있다. 비록 못 먹어서일망정 지나치게 살찐 국민들이 많지는 않다. 그것을 건강한 정도까지만 몸을 불리도록 통제할 수 있다면 거기가 바로 심신(心身)을 다스려 활기 충만한 사회 건설에 집중하는 사람들의 ‘신요크[理想鄕]’라 하겠다.
미얀마에 거주할 때 당시 대사님 한 분은 자신을 ‘주미 대사’라고 소개하곤 했다. 한국 외교관들 최고 목표의 하나가 주미 대사이고 보면 미얀마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덕담 삼아 다음엔 미국 대사로 가시라고 했었는데 그 분은 그리 응답했던 것이다. 사연인즉 자신
은 ‘미’얀마의 대사이니 이미 주미 대사 아니냐는 통쾌한 농담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미얀마라는 국명을 자신들 기준에 따라 인정하지 않았다. 오늘날 못난 한국인들 일부는 국내에 일하러 온 남아시아인들의 문화를 한국의 기준으로 재단하여 존중하지 않는다. 비만처럼 쓸데없는 자만(自慢) 그득한 ‘요크’의 구태를 벗어나려는 뜻이 진정이려면 만나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먼저여야 한다. 동시에 자신의 오늘을 겸허하게 되돌아보고 교정(矯正)하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앞으로의 세상은 체제나 이념을 넘어 그런 사람들이 이끌어가야 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이들을 남녀를 떠나 대장부라 부를 수 있겠다. 요컨대 대장부란 먹성 비롯한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사람을 말하며 그러기에 남을 이기기보다 ‘극기(克己)’에서 답을 찾는 사람이다./한유일(교사, shiningday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