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문보살

기사입력 : 2016년 0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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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고민 해결 마당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의 강연장에서 있었던 어떤 남성의 질문이다. “경전을 읽어보니 부처님 주위의 중요한 인물들이 전부 여자입니다. 당시 여자들은 출가조차도 어려웠다는데 어찌된 일일까요?” 주변은 그만 웃음 폭탄이 빵 터지고 말았다. 한국의 절들에서는 여성 신도분들을 보살이라 부르는 바 그것과 대승경전 속의 이상적 인물상인 보살을 혼동한 거였다. 질문자님 오해하셨어요.
캄보디아에서는 노래방 닮은 오락 시설을 KTV라고 부른다. 프놈펜은 물론이고 지방 도시들을 가도 거리마다 무수한 KTV 간판이 있다. 한 집 걸러 하나인 골목도 있을 정도이다. 성인들의 만만한 놀거리가 부족한 실태를 반영한 현상이기도 하다. 방캄한 어떤 한국 분께서 “이 나라에는 도대체 웬 방송국이 이렇게도 많은 것이냐.”고 놀라셨다는 얘기를 듣고 까르르 웃음보따리가 풀린 적이 있다. 방문객님도 오해하셨어요.
언제던가 눈부시게 하얀 벽에 부서지는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넘치는 볕의 화원(花園)으로 갑자기 모기들 몇 마리가 날아들었다. 손사래를 치고 머리를 흔들어도 요지부동 도망도 가지 않고 끈질기게 눈앞을 어른거린다 느꼈는데 아 글쎄 그게 오해였더라는 거다.

경험한 분들의 짐작대로 그건 실재가 아니라 모기처럼 보이는 비문증(飛蚊症)이란 증상이다. 현재까지의 최상 처방은 신경 끄고 모기들과 함께 편히 어울려 지내는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니까 있는 것이라 우기며 집착하고 고집하다 보면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비근한 경우로 ‘내 머리로 생각하자’는 말을 기존의 ‘자기 것’을 고집하라는 의미로 알면 난처하다. 잘 모르던 개념이라면 솔직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생각이 자라난다. ‘나는 옳다’에 근거해 경직된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 생각함이 아닌 묵수(墨守)일 뿐이다.
예를 들어 윤회(輪回)를 ‘먹는 욕심 부리다간 내생(來生)에 돼지 되는 거’로 알고 있다면 좀 곤란하다. 그런 식이면 출가수행은 다음 생에 좋은 환경에 태어나려는 목적의 행동이 된다. 그보다는 ‘번뇌의 파도가 반복하여 출렁댐’이 윤회의 본질에 가깝다. 그래서 삶을 고해(苦海)라고 하는데 이는 몸이나 마음의 고통을 뜻하기보다는 고뇌(苦惱) 요동의 실상을 표현한다. 수행의 목표는 내생의 좋은 몸이 아니라 윤회 사슬을 벗어나는 해탈(解脫)인 것이다.

모기를 소재로 삼은 얘기 하나 더 하면 오래 전 책에서 읽은 것인데 대충 이런 내용이다. 한낮의 땡볕 속에서 긴 외투를 걸친 채 꼼짝도 않고 서있는 늙은 수행자가 있었다. 지인들이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서 만류하며 이유를 물었다. 그는 조용하라며 조심스레 외투 안을 보여주었다. 세상에, 그 안에선 무수한 모기들이 그의 몸에 달라붙어 식사 중이었다.
고려 때의 한 명문장가가 쓴 ‘슬견설(虱犬說)’의 주제도 이와 비슷하다. 객(客)이 ‘복날 개 패듯’ 하는 개 잡는 광경을 오는길에 보았다며 그 처참함을 말하자 글의 주인공은 이 잡는 모습의 잔인함을 전한다. 어찌 미물(微物)인 이와 영물(靈物)인 개를 비교하냐며 놀리지 말라 화를 내는 객에게 화자는 생명의 무게는 같은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우리가 윗분들의 경지에까지 가기는 쉽지 않겠으나 그분들에게서 배울 점이 무얼까는 검토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단백질 섭취를 위하여 고기를 먹어야 하고 댕기열에 걸리면 안 되니 모기를 잡아야 한다. 그렇더라도 인격의 일정 수준 갖춘 이 뜻하는 ‘된사람’이라면 피치 못할 살생을 넘어 그것을 즐겨서는 아니 된다는 경책(警策)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조용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컴퓨터를 꺼내 전원을 켠 뒤 가방을 구석에 두었다. 얼마가 지나 작업을 끝내고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려는데 무수한 모기들이 후두둑 놀라서 뛰쳐나온다. 시커먼 가방 안쪽이 지들 안식처라도 되는 양 들어앉아 쉬시는 중이었던 거다.
나도 깜짝 놀랐지만 생각해보면 모기들은 정확하게 자기 본성을 수행한 것이다. 본능 따른 생명 활동으로 게으름 피우지 않고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들어간 거였다. 퍼뜩 머리를 두드린 느낌을 감동이라 하면 ‘오바’이겠으나 최선의 삶을 사는 그들 태도에는 분명 교훈이 있었다.
그것이 모기라 할지라도 그 미물에게서 무언가를 배웠다면 그는 나의 스승일 수 있다. 날로 각박해지는 지구촌 보노라면 모기 침만큼도 남에게 베풀지 않으려는 인간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대승불교에서는 타인 위해 살려는 커다란 원 세운 이를 보살이라 부른다. 당연히 보살은 상대에게 가르침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모기에게서 가르침 얻었다면 그들을 보살이라 못 부를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부여한 호칭이 문보살(蚊菩薩)이다.

‘나’의 스펙을 쌓고 ‘나’의 성공을 거두기 위하여 1분 1초를 아껴 최선을 다하는 게 한국인의 오늘 모습이다. 그렇게 나보다 나아 보이는 위쪽을 바라보며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그런데 눈썹 휘날릴 듯 바쁘게 살면서 성취하려는 성공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새삼 위인들 말씀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존재라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럼에도 ‘나’의 성공 위해서만 최선인 오늘의 대다수 우리가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들을 별생각 없이 마뜩치 않아 한다면 그건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친일파의 대다수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살면서 당시 기준으로 성공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성공의 뒤안길에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런 식의 최선이란 모기도 성공하고 있는 수준이라는 말씀이다. 바로 코앞에 닥친 선거에서 인물 고르기가 정말 어렵다면 투표장에 가기 전 최소한 문보살을 기준 삼아 고심(苦心)하여 최악의 윤똑똑이를 걸러낼 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애국’이란 개념이나 단어가 없다는 말 듣고 놀란 일이 있었는데 실제로 알아보니 살기 팍팍해 내세우지 못한 것일 뿐 단어와 개념 모두 다 있었다. 개념과 단어만 있고 실제 애국의 행동은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렸다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 아닐까. 그러니 우리는 개인 발전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공동체에 대해서도 하루 1분씩만 생각하기로 하자. 적어도 1분 내 나라, 인류 전체에 고민의 눈길을 주어보자. 그런 정도 되어야 친일 무리를 나무랄 수 있고 머리 텅텅 빈 외세 추종(追從)도 멈출 수 있다./한유일(교사 : shiningday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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