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산타클로스

기사입력 : 2015년 12월 23일

여느 부모처럼 우리도 아이들이 어려서는 산타놀이를 했다. 비밀 첩보작전이라도 펼치듯 선물을 은밀히 장만해 집안 모처에 꽁꽁 숨겨두었다가 크리스마스 밤 아이들이 곯아떨어지기를 기다려 살금살금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산타할아버지 저를 저버리지 마세요.’, 마지막 기도를 쏟아 붓다 어렵사리 잠든 아이들은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의 선물보따리부터 확인했다. “변신 로봇 좀 봐!” “세일러 문이다!” 건너 방으로부터 들려오는 천진한 탄성을 듣는 재미가 옥시글옥시글했다. “그런데 포장지가 우리 동네 장난감 가게거랑 똑같지 않아?” “산타 알바형이 어떻게 내 소원을 알았을까?” 미심쩍어하기도 했지만 녀석들이 순진을 가장하고 매년 산타클로스에게 공개기도를 하는 바람에 산타사기극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종교 회의론자들은 산타의 그것처럼 초자연 현상에 의존하는 행위를 지적인 반역으로 치부한다. <종의 기원>으로 유명한 다윈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은 과연 신이 기도에 응답을 하는지, 기도에 대한 효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영국의 전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왕실의 건강을 기원하는 공개기도를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왕실 가족의 건강과 일반인의 건강 간 역학관계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 기도를 받는 왕족이나 기도를 받지 않는 일반인이나 통계학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났다. 존경과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일수록 시샘과 증오의 대상이 되기 십상인데 대중의 의례적인 기도에 순/불순 의도가 어떻게 투영 됐을지, 가늠이 가능키나 한 것인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라고 말한 파울로 코엘료의 상상력에 비하면 프랜시스 골턴은 상상력이 꽤나 부족한 사람인 듯싶다. 절망이나 희망이나 모두 허망한 것이라면 그래도 희구하는 편을 택할 것 같다. 어차피 알게 될 현실인바에야 산타를 믿는 시기를 늘려주고 싶은 마음과 닿아있다고나 할까.

어느덧 산타의 계절이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겹친 이 시즌에 이르면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도 한 해를 돌아보게 되고 뭔가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사랑과 박애로 요약되는 종교적 심성에 젖어드는 것이다 (연중 콘돔판매량 최고 날이 크리스마스라는 편의점업계 통계로 보아 사랑과 박애가 지나친 구석도 없잖아 있지만). 인생은 4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1단계, 산타를 믿는다. 2단계, 더 이상 산타를 믿지 않는다. 3단계, 스스로 산타노릇을 한다. 4단계, 저절로 산타처럼 보인다. 어린 것들을 보면 이내 풀어지는 표정이나 직선을 찾아보기 힘든 푸짐한 몸매로 보건대 4단계가 머지않았다. 산타클로스에 대한 유래는 각 문화권마다 다르지만 연말에 선물을 나누는 서구 풍습과 그 틈을 노린 상업주의가 어우러져 탄생한 캐릭터가 요즘의 글로벌 산타클로즈일 터이다. “하느님이 각 가정에 천사를 보낼 수 없어 어머니를 보냈다”는 것처럼, 하룻밤 사이에 전 세계 어린이를 찾아 선물을 배달해야 하는 산타할아버지 대신 각 가정에 아버지를 보내지 않았나 싶다.(부모 만세!)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