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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 칼럼] 영결(永訣)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 는 이청준 작가의 동화로, 어린 손녀가 죽음에 이르는 할머니를 지켜보는 얘기다. 칠순잔치를 치룬 후 할머니 키가 나날이 작아진다. 작아진 키만큼 옛날로 되돌아가 새댁처럼, 처녀처럼, 아기처럼 행동한다. 노인성 치매가 온 것이다. “아빠 할머니께서 요즈음 어째서 자꾸 옛날 얘기만 하세요? 그리고 왜 자꾸 어린아이처럼 되어 가세요?” 딸아이의 질문에, 할머니가 나이를 먹으면서 쌓아온 지혜와 사랑을 손녀에게 나누어주고 더 나누어 줄 게 없을 정도로 조그마해지면 세상에서 모습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동화는 작가 어머니의 장례를 소재로 한 영화 축제>의 모태가 된 작품이다.
꼭두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는 집안 부고이기 십상이다. 명절을 며칠 앞둔 이른 아침 부친 타계 전갈이 왔다. 구십을 바라보시지만, 요즘 세상으로선 아쉽지 않을 수 없다. 육척 가까웠던 훤칠한 키는 말라깽이 사내아이처럼 쪼그라들고, 언제나 올려다 볼 수밖에 없어 컴컴한 동굴 같았던 콧속엔 하얀 솜이 채워져 있었다. 조근 조근 후손에게 경험을 나누어주고 돌아가는 조부모 얘기는 동화에나 있을 뿐, 생계와 학업을 핑계로 가족 일원의 일방적인 희생이나 사회 시스템에 방치하기 일쑤인 게 현실이다. 상실감과 슬픔보다 죄책감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장례식장이야말로 인간은 관계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다. 혈연에 닿아있는 이들과 고인에게 선의의 정리가 남아있는 이들이 모두 모였다. 부친께선 당신이 처한 상황이나 상대방의 면면에 따라 달리 처신하셨던지, 저마다 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정부를 칭송하고 친일파를 비난하셨지만, 남몰래 야당인사 연설 테이프를 즐겨듣고 밥상머리에서는 일본인의 근면성과 인사성은 배워야 한다며 이중성을 보이셨으니.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과 서슬 퍼런 독재치하에서 몸에 밴 보신주의 탓일 테다. 대가족을 이끌며 파쇼처럼 군림하던 유년기의 아버지는 ‘두려운 그리움’의 존재였지만, 자식들 머리가 굵어짐에 따라 ‘불편한 그리움’의 존재로 변해가셨다. 마음 따로 몸 따로, 강퍅한 현실에 매몰된 기성세대로서 자유로울 수 없는 ‘효(孝)’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리라. 영화 <축제>에서처럼, 아버지와 영결하고 돌아오는 길엔 착잡한 심정과 한 가지 숙제를 끝낸 듯한 기분이 교차되었다. 다행히(?) 별다른 유산을 남기지 않으신 덕에 누구네 왕자의 난 따위, 동기간 이전투구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친은 남편의 죽음도 모른 채 중증치매 판정을 받고 병원에 계신다. 병실을 가득채운 노인들, 간병인, 방문객, 의료진으로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다. 정신도 생리현상도 통제를 못하시는 어머니, 이제 막 병고에 시달리던 노구를 떠난 아버지, 그리고 미래의 내 모습이 중첩되면서, 무슨 망발인지, 사형대로 향하기 전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길을 갑시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어느 쪽이 더 좋은가 하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 뿐입니다.”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