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수학의 세계

기사입력 : 2015년 09월 22일

“낙엽(落葉)이 우수수 떨어질 때, / 겨울의 기나긴 밤, /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 옛이야기 들어라. //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 이 이야기 듣는가? / 묻지도 말아라, 내일(來日)날에 / 내가 부모(父母)되어서 알아보리라.”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부모”라는 노래다. 오래 전 큰언니 혼인날을 받아놓고 살림솜씨 다부진 친척 아주머니들이 모여 원앙금침을 꿰매던 때, 다 같이 호기 있게 합창으로 시작했다가 한 분 두 분 노래를 이어가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시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 눈물의 의미를 몰라 당황했는데, 느른한 휴일 설거지꺼리를 앞에 두고 무심코 흥얼거리다보니 가사와 곡조의 애상함에 어머니 얼굴이 겹쳐 노래가 자꾸만 일그러져 나온다. 이해가 되고 느낌이 오는 것도 다 때가 있나보다.

당시 여고생이던 내가 바늘에 실 끼워주는 일을 도맡아 했는데, “너는 배웠다는 애가 실 길이를 이리도 못 맞추느냐?”, 힐난을 받곤 했다. 마지막 시침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실이 모자랐을 때다. 이불의 길이, 이불의 두께, 바느질의 종류 등을 알려주고 필요한 실의 길이를 구하라는 수학문제가 나왔다면 잘 풀었으련만. 요즘도 심신이 피로할 때면 벼락치기 수학시험을 치르는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이 갑자기 수학얘기를 하게 되었다. 최근 수포자(수학 포기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이 뜨거워서다. 수학 학습량을 대폭 축소하자는 주장의 근거로 ‘수학이 현실성 없는 학문’임을 내세우는 여론이 많은 건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다.

캄보디아에서 건축행위를 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을 꼽으라면 역시 수학적 사고의 부재다. 고등교육을 받고도 센티와 인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사소한 일임에도 유추하여 결정하는 데 난색을 표한다. 단지 사칙연산의 문제라기보다 복잡한 것에서 패턴을 구하고 일련의 과정을 추론하는 훈련, 즉 논리적 사유의 문제인 듯싶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한 번에 되는 일이 거의 없다.

건축분야뿐이겠는가. 철학자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미 “수학은 지식 그 자체다”고 말한 바 있다. 아침나절 흥얼거린 ‘부모’라는 노래도 황금비율로 수열화 된 음정과 박자의 흐름이다. 소월의 시에서도 글자 수 3, 4, 5의 배열에 따른 일정한 운율이 느껴진다. 노래를 부르면서 고조되는 ‘마음’이라는 것도 인지 신경학에서는 여러 신경체계의 네트워크일 따름임을 입증하고 있다. 극한값을 다루는 미적분의 세계처럼 신경망이 극도로 촘촘하다보니 모든 것을 관장하는 ‘자아’가 존재하는 듯 착각하는 것이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 계량할 수 없었던 사랑의 량도 수치화 할 수 있는 날이 그리 먼 미래가 아니라는 의미다. (늘 더 사랑하는 편이라 들키고 싶지 않지만) 자판의 문자 하나하나에 고유의 코드가 부여돼 있고 우리가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GPS 좌표로 인식되는 시대다. 수학이 모든 인류 문명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 셈이니, 현대사회는 수학이 이끌어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