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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 칼럼] 말(馬)
팽팽한 가슴, 잘록한 허리, 살랑살랑 흔들리는 엉덩이, 곧게 뻗은 각선미. 뭇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먼로워크(Monroe Walk)의 비밀은 하이힐에 있다. 하이힐을 신으면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려 가슴은 더욱 봉긋하게 솟고 허리선이 긴장되면서 엉덩이는 살짝 들려 매혹적인 몸매로 변신한다. 하이힐은 유럽 중세부터 신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숙녀가 아닌 신사의 전유물이었다. 당시는 자동차 대신 말이나 마차로 이동하던 시기로 말똥이 도로 가득 널려있었다. 요즘 자동차 배기가스공해 못지않게 말똥공해가 심각한 골칫거리였다. 말똥을 밟지 않으려고 신발 밑에 굽을 덧대 신기 시작한 게 하이힐의 기원이다. 한편으로는 말을 탈 때 발을 더 단단히 걸 수 있도록 고안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때의 굽은 앞뒤가 뭉툭하고 상당히 높았다. 굽 높이가 최소한 말똥높이를 능가해야 했기 때문이리라. 그 후 여성의 패션코드와 맞아떨어져 오늘날의 하이힐로 진화했다.
2007년 우주왕복선 엔데버호 추진로켓의 규격은 기차선로 폭에 맞춰 설계되었다. 유타공장에서 플로리다 미 항공우주발사대까지 기차로 옮겨야만 했기 때문이다. 폭 1.435미터 선로 표준궤간은 남북전쟁 후 북군이 승리함에 따라 동북부지역 표준인 영국 기차선로 폭으로 통일하면서 확정되었다. 그렇다면 영국 기차선로는 어떻게 정해졌을까? 19세기 초 석탄 운반용 마차로 폭에 맞춰 기차선로를 설치하면서부터였다. 마차선로 폭은 그로부터 장장 2천여 년 전 영국을 정복한 로마군이 ‘로마로 통하는 길’을 만들기 위해 로마전차 폭에 맞춰 마차선로를 건설한 데서 시작되었다. 당연히 그 마차선로는 고대로마의 치수를 차용했는데, 마차를 끄는 말 두 마리가 나란히 달릴 수 있는 두 말의 엉덩이 폭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결국 21세기 최첨단 우주왕복선 규격이 영화 ‘벤허’ 전차 경주에 등장했던, 2천여 년 전 말 두 필의 엉덩이 폭에서 나온 셈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물자가 쏟아져 나오는 듯하지만, 생활과 밀접한 것일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먼 과거와 닿아있다. 현실은 이렇듯 관성의 지배를 받기 십상이다.
말처럼 인류와 오랜 세월을 가까이 지낸 동물도 드물다. BC 3천 년경부터 가축화 된 흔적이 남아있으니. 불과 수십 년 전 기계에 자리를 내 주기 전까지 도로의 자동차, 전쟁의 탱크, 파발마의 정보통신역할까지 도맡아 마정(馬政)이 국력의 핵심일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가죽은 신발과 옷, 고기는 식용, 뼈는 아교의 재료로, 뭐 하나 버릴 것 없이 유용한 동물이다. 말은 자신의 그림자에 놀라는 겁쟁이에다 개보다 지능이 한참 떨어진다고 한다. 그 덩치에 개처럼 명민했다면 위협적인 맹수로 군림했을 테고, 그런 우직한 천성 덕에 지금껏 인간의 사랑을 받고 있지 않나 싶다. 말에 관계되는 산업이 기계문명에 밀려 한동안 잊혀졌지만 레저와 스포츠분야를 비롯해 재활 승마를 통한 힐링에 이르기까지 새로이 주목받고 있다. 유휴지가 넉넉하고 기나긴 지평선을 지닌 캄보디아에도 어울릴 듯한데…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