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유아의 독존

기사입력 : 2015년 07월 30일

몬돌끼리의 한 끼니 과장의 수사법 빌어 말하면 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로 먹고 사는 나라이다. 농업과 봉제업을 제하면 별다른 산업이 없어 관광이 주된 수입원의 하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인의 명승지(名勝地) 방문 추세를 감안한다면 관광업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될 게 틀림없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나라는 축복받은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에 시엠립 공항은 300만 관광객을 유치했다 하며 매년 약 13%의 증가세라 하니 올해는 그 수가 더욱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개인의식’의 자각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에 따르자면 그와 같이 ‘자기’가 중요해지면서 나의 눈으로 직접 보고 내 몸으로 겪으려는 경향이 강화되었고 그것은 자연스레 세계 관광업의 융성(隆盛)으로 귀결되었다.
다시 말해 전술(前述)한 현상들은 ‘나’라는 주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관광이란 따지고 보면 ‘나’가 ‘보고 듣고 겪는 일’일 뿐이다. 때로 그악스런 자기중심 관광 태도의 이기적 사례들을 과도(過度)하게 탓할 게 없는 것이 내가 밥을 먹어야 내 배가 부르듯 내 눈으로 보지 않으면 백 번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음 탓이다.

가끔씩 다른 종교의 기도처나 유적지에 나타나 자신의 종교만이 위대하다고 강짜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유일신을 믿는 어떤 이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나만 존귀함’이라고 해석하여 신에 대한 오만이라고 주장한다 하자. 유일신 모심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다 해도 과연 이는 바른 지적일 수 있을까.
나는 앞의 표현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와 매우 비슷한 말로 이해한다. 유일신교에 의한다 해도 인간은 신의 대리인 격으로 상당한 주체적 판단의 능력을 인정받는다. 그리하여 ‘스스로 돕는’ 정도의 사랑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것을 세상에 몸 움직여 구현할 수 있어야 신의 구원을 받을 자격을 얻음을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었다.
같은 맥락에서 ‘독존’하는 나는 인간이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여야 함을 아는 개인이다. 그러한 자애로움을 가꿔 갖춘 존재여야 ‘유아’의 조건을 취득한 것이 된다. ‘스스로 돕는 자’이거나 ‘유아독존’하는 자가 아니라면 흘러간 유행어에 기대어 미안하지만 한마디로 ‘사람이 아니므니다’인 것이다.

대학 때 읽어 가물가물하지만 칼 야스퍼스가 자신의 저술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인류가 꼽는 네댓 성인들이 천상에서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과학으로 개명(開明)된 21세기 이스라엘이나 IS 주연(主演)의 살벌한 살육 현실과는 정반대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실 것이라는 요지의 날카로운 혜언(慧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웃음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외교적 치레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의 뜻하는 바가 같음을 알고 인정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는 환한 웃음이다. ‘나’가 세상에 온 뜻을 깨달아 알아야 함을, 그래서 그 깨달은 바를 행하는 자가 ‘유아’이고 ‘스스로 돕는 자’임을 공감한다는 뜻의 파안대소(破顔大笑)일 것을 밝은 대낮 해를 대하듯 느꼈었다.
예컨대 캄보디아의 총리와 야당 총재는 최근 들어 대화의 정치를 표방하며 한 자리 앉아 웃는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 웃음 위에다 너무나도 또렷하게 자신 이익의 의도를 피워내고 있었다. 그러기에 역류(逆流)하지 않는 물처럼 국민의 공감보다는 반감을 불러오는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이다.

사실 60억 넘는다는 인류의 대다수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한 실상에 가깝다. 동물과 다르지 않게 남을 해쳐 먹어야만 사는 존재로서 인간의 이기성은 어느 정도 보장되어야 함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종교라는 문화 현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시사(示唆)하는 바는 무엇일까.
한편 거의 모든 종교인의 기도 행태 역시 자신과 자신의 확장인 가족을 위한 기복 신앙인 게 솔직한 현실일 터이다. 원시시대 번쩍이는 번개 속 두려움이라는 원초적 불안의 연장선에서 복 빌기도 어느 정도는 정당하다 해야 옳을 듯하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고 만다면 인간을 일러 굳이 만물의 영장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개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영험의 존재로 진화(進化)한 인간이 종교라는 문화를 갖고 인류에 기여할 길은 무엇일까. ‘다름’의 극대화에 치중했던 비극의 역사는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교류의 새 천년은 그러므로 ‘같음’에 주목하는 문화가 승(勝)할 때라고 나는 믿는다.

오늘도 일년 한결같은 뙤약볕 무릅쓰고 시엠립을 찾는 세계인의 발걸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직 자신이 존귀하다는 것은 그렇게 내가 내 입에 밥을 떠 넣는 일에 다름 아니다. 남이 밥 먹어 내 배가 부르다면 당연히 인류에 전쟁은 없었을 것이며 볼거리에 몰리는 관광객도 생기지 않을 것임은 백천만 번 지당한 말씀인 게다. 다만 게서 한 걸음만 나아가 상대방 모두도 전부 ‘나’임을 아는 공부를 시작하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의 첩경(捷徑)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 지점에서 내가 그려보는 ‘한여름 낮의 꿈’ 같은 기발한 상상은 종교인이 해야 할 ‘바른 관광’의 가이드 역할이다. 그러니까 남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이타의 문화를 글이나 여타 작품으로 남겨 인류에 기여하는 관광객에게는 리베이트를 주도록 하는 운동을 종교인이 주동되어 벌이자는 것이다. 이것은 상식(常識)의 시각에 따르면 문화 사업에 가까울 것인데 종교인을 거론하는 것은 그 성격의 거룩함에 기인한다 하겠다.
처음에는 돈의 일부를 돌려받으려는 이기심에서 남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공부를 하게 될지 모르나 그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납득해야 하리라. 허나 그러다 보면 종교 다르고 피부색 다르고 먹는 것 다르고 하는 일 다른 그들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은 인간임을 깨닫게 되지 않겠는가. 결과적으로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연결되는 참공부를 하게 될 것인데 그리 될 때 그것이 진짜 생활관광이며 생활종교이고 궁극에는 생활사랑이 아닐까.
그런 ‘나들’의 생존방식을 나는 ‘스스로 돕는 유아의 독존’이라 부르고 싶다. / 한유일(교사, shiningday1@naver.com)

 

스스로 돕는 통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