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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이 보는 세상] 먹을 수 있어서 좋구나
영화 “명량”을 개봉 1년이 되어가는 즈음에서야 보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더위 익어가는 칠월의 첫 주 일요일 밤 홀로 앉아 노트북 화면을 통해 감동의 명화를 감상하였다. 시조(時調)로 읽었던 ‘한산섬 수루(戍樓)’의 고독이 오롯이 전달되는 듯했다. 엄청난 적군 인한 두려움과 맞선 실존 개인의 아픈 내면이 아련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프놈펜 더워 서울이 덥고 캄보디아 가물어 대한민국이 가물다. 엘니뇨 인해 전 지구적으로 흡사(恰似)한 기상 이변이 일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성현을 닮으려는 욕구 또한 지구 차원으로 번져갈 수 있다 믿는다.
가끔씩 홀로 아파하거니와 선(善)과 집권 능력의 엇비례가 가져오는 압도적인 악(惡)의 충일(充溢)을 어찌해야 하는가. 지구촌의 여러 나라 소위 지도층에서 보이는 표독하고 이기적인 행태들은 어찌할 것인가. 최강대국 빼어난 대통령 오바마도 제3세계 출신 유엔 사무총장도 그저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양심 지닌 ‘나들’로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대중예술로서의 영화가 지닌 역할에 주목해 보게 된 건 그 때문이다. 영화 역시 예술이면 피할 수 없는 수준이 요구되지만 대중이란 용어가 가진 넓은 포용성은 그것을 다소 느슨하게 만들어 여유를 준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자조적인지 모르겠으나 어쩌면 현대사회의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주말에 영화 하나 보고 울고 웃는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연히 보게 된 것들 중 싸이코패스와 폭력이 예쁘게 화면 장식하는 속소위 누아르라 불리는 영화들이 있다. “악마를 보았다”라든가 “범죄와의 전쟁” 같은 작품들 말이다. 그런데 유심히 보았으되 주제가 무엇인지 아둔한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가령 교훈을 주고 경각심을 갖게 하려는 게 주제였다면 지나치게 잔혹한 영상들인 것 같다. 인육을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거나 개미 똥만큼의 동정(同情)도 없이 여성을 강간 살해하거나 순간의 주저도 아깝다는 듯 술병으로 사람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불필요하다. 더욱이 그런 장면들이 무엇 때문인지 뛰어난 영상 구성 속에 담겨진다는 것은 누구의 내면에나 조금씩은 있는 마성(魔性)을 증폭시키는 불쾌함을 수반(隨伴)해 정말 유감스럽다.
그런 감독들은 관객의 수준을 어느 정도에다 겨냥하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요즘의 뉴스들로 보건대 영상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듯하고 그에 따라 멋져 보이는 영상을 무조건 모방하려는 눈높이 관객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에게 때로 아름답기조차 한 살육장면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면 심히 걱정스럽다. 그러면서 ‘양고기 맛을 알려면 한 점으로 족하다’는 법정 스님의 명인용(名引用)을 떠올린다. 된장인지 가려내려고 똥까지 먹어보는 경험은 매우 과하지 않은가.
인류 최대 살인마의 하나인 히틀러는 “나의 투쟁”이라는 조악(粗惡)한 책을 남겼다. 그러나 그에 힘입어 독일에는 ‘네오나치즘’ 같은 신나치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없애기 어려워진 그와 같은 책만으로도 인류에겐 악이 진동할 조건이 넘치는 판이다. 그러면 액션을 보고자 하는 관객들의 욕구는 어쩌란 말이냐 물을 수 있겠다. 나는 그 정답으로서 청룽[成龍]류의 영화들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통쾌하고 시원스런 눈맛을 주는 멋진 액션들에 피가 튀지 않는다는 원칙을 숨겼다고 들었다. 거기에 대다수 권선징악인 주제도 현실과 동떨어진 유치함이라 손가락질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마음에 든다. 그렇다면 성현(聖賢) 위주의 영화만 만들라는 것이냐 반문(反問) 있겠으되 그것이 주류(主流) 되는 세상이었으면 한다.
나에게 충무공을 평가하라 하면 영화나 문학 등 예술의 미감(未感)으로 기리기 앞서 자체의 인격만으로도 넘치고 남는 분이라 말하고 싶다. 이런 맥락에서 충무공에 관한 작품들은 완성도를 크게 따질 필요가 없다. 덧붙여 단순히 한국인의 선조(先祖)라서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집안’을 빛내서가 아니라 인류에 드문 ‘된사람’이어서 자랑스러운 것이다. 성인들 몇 제외한다면 전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만한 인격의 완성이란 판단이 흠모(欽慕)의 근거이다. 몇 번의 전투들에서는 처음부터 생명을 건 흔적이 역력(歷歷)하건만 그저 일본인이기에 상대를 미워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문건들은 인터넷상에도 수두룩하다.
언젠가 읽은 자료에 따르면 공은 당시 전쟁의 보편적 현상이었던 적의 수급(首級)을 모으는 따위 전공 추스르기에 몰두하지 않았다. 부하의 전공(戰功)을 알뜰히 알아주었으며 자신 드러내기 집착한 증거 없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혼신 다해 전투 임했을 뿐 전쟁마다 으레 드러나기 마련인 살육 자체를 즐기거나 광분(狂忿)에 몰입하는 행위들을 매우 꺼렸다.
“명량”에서 내가 가장 감동 받은 대사는 “먹을 수 있어서 좋구나!”이다. 충무공 또한 생명체였기에 죽기보다는 살기를 좋아했던, 뜨거운 피의 인간임을 드러낸 명대사이다. 그 부분은 영화 말미 전투가 승리로 귀결된 뒤 충직한 젊은 노꾼이 건넨 토란을 받아먹으며 자리를 나누어준, 눈시울 따뜻하게 한 명장면으로 각인(刻印)된다.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나 한번쯤 영화 속 인물에 자신을 대입해 보지 않을까. “명량”이라면 나는 어떤 인물쯤일까. 충무공은 참으로 존경스럽고 닮고 싶지만 너무 무겁고 감당하기 어렵다. 나대용의 충직 정도면 버텨낼 수 있을까 싶지만 그 또한 상당히 버겁다. 나에게 선택하라면 젊다기보다는 아직 어린 토란 주인공 노꾼만큼의 정의감과 실천을 배우고 싶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시대 혼탁과 인물 부재의 원망에 앞서 ‘나 먼저 그 정도의 백성 되기’만큼은 갖추려 할 때 한국은 달라질 것이고, 기간 대비 유례없고 전무후무할 누적 관객수 1,761만 구름관객 몰린 의미도 살아날 것이다.
요컨대 선함과 능력이 겸비된 장수(將帥)로서 지구 차원 길스승이기에 기억하고 존경하자는 것이다. 결코 일본을 미워하고 국수주의적 관점을 퍼뜨리려는 의도는 없다. 나 자신 본받고 싶고 혼돈스런 현 한국의 국민들과 인류에게도 길스승 삼아 따라하자고 권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