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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이 보는 세상] 나오신 커피
조선인은 패야 한다는 논리가 있다. 아마도 일제 강점의 식민지 기간에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던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아닐까 한다. 그저 흘러간 옛 얘기라면 굳이 입에 담을 필요 없겠으나 새 천년 새 숨결의 한국인들에게도 의외의 설득력을 갖고 있는 듯하여 함께 궁구(窮究)해보려는 것이다.
짧은 나의 경험을 근거로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을 비교해보면 개인 단위에선 대체로 한국인이 똑똑한 것 같다. 대한제국 시대에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론했을 때 도래(渡來)한 일본인들의 위정(爲政)이 쉽지는 않았을 터이다. 강력한 무단통치(武斷統治)가 아니라면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하는 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우스개로 한국인의 JQ 지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고라고 하거니와 개체로서의 한국인은 확실히 영민(英敏)한 것 같다. 멍청한 상위자가 그런 똘똘한 개인들을 다스리자면 말보다 폭력이 앞섰을 거란 건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짐작 가능하다. 수월하게 통제되던 백성만 보아왔던 실권자(實權者)로서는 더욱 그러했으리라.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외래적인 시각이 은연중에 내재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 시절 날리던 집단의 은밀한 손길을 통해 우리 스스로 한국인은 좀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잠재의식이 무섭다는 게다. 널리 퍼져 사회화 비슷하게 되면 집단을 통제해야 할 경우에 폭력의 유혹에 넘어가기 십상이다.
서양에 간 한국 유학생들은 질문을 못 하는 경향이 도드라진다 들었다. 분명 한국의 어린이들도 세계 어디에서나처럼 발표 욕구에 넘쳐 손을 들고 난리를 치던 호기심 덩어리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세상 이치를 터득한 듯 서서히 뜻을 접고 대한민국의 흐름에 순응한다.
최근 어린이집 사태는 위의 과정으로 형성된 한국적 흐름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고 나는 해석한다. 유달리 머리가 좋아 활력이 넘치는 유전자의 한국인들을 손쉽게 다루는 방법은 폭력이 제일이라는 주입(注入) 사고의 만연 말이다. 그렇게 해서 획일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인데 하기는 천편일률(千篇一律)의 주입식이 당장은 편리한 측면도 많기는 하리라.
그처럼 제 머리를 움직이는 일에서 제어당하길 내면화한 한국인들은 남의 의견을 주입 받으며 어느덧 자신의 견해는 ‘안드로메다’에 보낸 채 살아가는데 익숙해졌다.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좋은 머리를 타고 났음에도 자기 머리로 생각하기를 매우 싫어한다. 책읽기를 싫어하고 애국심의 빌미를 대지만 실은 단지 어려운 게 싫어서 한자 공부를 마다하기도 한다.
하지만 흘러간 시절 소위 지도층의 잘못으로 상황이 꼬였다고 하여 지금껏 지속되는 잘못을 방기(放棄)할 순 없다. 늦었더라도 그르다는 걸 알았다면 이미 익숙해졌기에 당장 고치기는 힘들다 해도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覺醒)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부터라도 그 좋은 집단지성을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조금은 어려워보이는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우리는 지구촌 어느 언어의 문자에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글자를 가지고 있다. 특히 표음(表音) 면에서 매우 탁월해 우리 민족의 표현 욕구를 아주 적확하게 만족시킨다. 그런데 ‘쉬운 것도 병인 양하여’ 아쉽게도 함부로 마구 쓰는 경향 또한 유례(類例) 없이 강하다.
어느 해인가 예쁜 연예인이 “부자 되세요!” 소리 질러 히트한 광고가 있었다. 내 보기에 그런 뒤로 ‘되세요’의 문장이 들불처럼 번져 ‘좋은 하루 되세요.’에서 ‘즐거운 시간 되세요.’까지 온통 일상을 점령했다. 그런데 이 ‘되다’는 ‘아니다’와 더불어 우리말에서는 드물게 주어 외에 보어를 요구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되다’ 앞에서 ‘이/가’의 조사가 붙어 나오는 말은 주어가 아니라 보어이다. 보통의 한국인은, 문맥상 짐작 가능할 때 과감하게 주어를 생략하는 한국어의 특성을 잘 알고 있다. 앞의 문장들에서 주어는 생략되어 있지만 말 듣는 사람인 ‘여러분’ 정도가 적당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말 듣는 ‘사람인 여러분’은 의당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인 우리가 ‘시간’이 되고 ‘하루’가 되는 일은 기적(奇蹟)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뛰어나게 쉬운 문자를 겨레에 선물한 세종대왕이 진정 자랑스럽다면 몸에 익었다고 하는 이유만으로 우리말을 이렇게 망가뜨리는 일이 더이상 방치(放置)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 한국의 카페들에서 “커피 나오셨습니다.” 하는 종업원들의 말을 자주 듣는다고 누군가 개탄했다. 건방지다는 트집의 갑질에 질린 종업원들로선 모든 말에 높임을 하는 게 본능처럼 몸에 굳어졌다는 게다. 문맹률 제로에 가까운 명민(明敏)한 현대의 한국인에게 ‘시’란 요소는 주어를 높이는 경우에만 사용한다는 걸 알게 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용이한 일이다.
그러니 지구가 폭발하거나 한국어가 증발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커피는 절대로 ‘나오실’ 수 없다. 포퓰리즘이라 불려야 고결(高潔)할지 모를 현실추수주의(現實追隨主義)가 바르지 않다면, 이러한 사소한 잘못들이 다수의 각성과 논의를 통해 바로잡히는 사회라야 커다란 덩어리의 정치마저 바로 세울 수 있게 된다. 몰지각한 고객의 갑질이 무서워 물건인 주어를 마구 높이는 행위는, 아름답고 우아한 우리말글에 방향을 잘못 잡은 분풀이를 가하는 가학(加虐)적 갑질이라고 나는 느낀다.
언젠가도 지적한 바이지만 ‘다른’을 ‘틀린’이라고 하는 잘못만 바로잡아도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나오실’ 수 없는 커피는 그저 나오게만 해야 한다. 행복한 하루를 ‘보내셔야’ 할 여러분들이 그냥 ‘귀차니즘’에 젖어 또는 단순히 먹고 살기 바쁘다 하여, 대책 없이 맞으며 살아야 했던 조선인처럼 ‘시간’이 되고 ‘하루’가 되고 ‘여행’이 되고 싶으신가!
한유일(교사) shiningday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