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키친 타이머

기사입력 : 2015년 0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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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해 마누라가 예뻐 보이면 건망증, 술 깨고도 마누라가 예뻐 보이면 치매라고 한다. 남편은 건망증도 치매도 아닌 게 확실하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 어릴 적부터 깜빡깜빡 잊어버리기 명수였지만, 캄보디아로 온 후 증세가 심해졌다. 살림 하는 주부로서 크메르어 중 가장 먼저 배운 게“틀라이 나!(비싸요!)”였는데, 시장에서 기껏 물건 값을 에누리해 놓고 “그런데 얼마였죠?” 처음 가격을 잊어버리는가 하면, 겨드랑이에 꿰찬 지갑 찾느라 핸드백을 뒤집어엎기 일쑤였다. “어느 집 여편네가 또 음식을 태우나?” 하고 보면 여지없이 우리 집 주방에서 벌어진 사단이라, 요즘은 치매 초기 증상이 아닌가 의심받기에 이르렀다.

건망증의 주 원인은 집중력 감퇴에 있다. 대표적인 게 ‘디지털 건망증’이다. 디지털 시대에 과다한 정보습득으로 인해 몰입도가 떨어지게 되고, 디지털 기기에 기억을 의존하다보니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스마트폰질을 하다 책자에 실린 작은 사진을 보면 두 손가락으로 확대하고 싶어지는데 저만 그런 건 아니죠?) 획수가 많은 한자를 쓰는 중국의 젊은이 중 키보드 없이 손글씨로 자기 이름을 못 쓰는 이들이 상당하다는데, 문자가 어려운 캄보디아도 우려되는 현상이다. 그러고 보면 ‘디아스포라 건망증’도 성립하지 않을까싶다. 언어와 관습이 다른 물설고 낯선 땅, 신변이 불안한 이민생활에선 의식 한 자락이 늘 긴장하기 마련이라, 신경이 분산되어 집중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일 터이니. 건망증은 뭐니 뭐니 해도 노화 탓이 크다. “거기가 어디였더라?” “누구누구 갔었지?”, 같은 추억을 가진 사람 여럿이 모이지 않는 한 그 상황을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해 머리를 쥐어짜는 모습은 중장년층의 흔한 풍경이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건망증과 치매는 서로 무관한 독립적인 증상이라고 한다. 건망증은 일부 신경세포의 기능적 변화에 의한 것이고 치매는 신경세포 자체의 손실에 의한 것이다. 어떤 사실을 기억하려면 세 가지 과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정보를 얻는 일(학습), 학습을 유지하는 일(저장), 저장된 것을 상기 하는 일(인출)의 순이다. 일테면 건망증은 기억의 인출 능력에 장애가 생긴 것이고 치매는 기억시스템 자체에 이상이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망각 증세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장기기억에 저장되는 기억의 ‘응고화’ 현상도 일어난다. 술꾼이 필름이 끊겨도 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한 번 확립된 개념이나 가치관은 무의식에 각인되어 생각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건망증과 치매에 영혼을 잠식당한 후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추레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면 평소 마음을 청결하고 환하게 갈고 닦을 일이다. 방학을 맞아 캄보디아로 돌아온 아들 녀석이 ‘키친 타이머’를 사왔다. 며칠이 멀다하고 태운 음식을 먹는데 질린 남편의 성화 탓이다. 외계에서 날아온 물건 마냥 모양이 요상스럽다. ‘왜 시간을 맞췄지?’ 할 때까진 건망증일 테지만, ‘이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하게 되는 날엔…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