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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 칼럼] 지덕체의 새해
2015년 을미년 새해가 밝았다.‘2014’라는 햇수에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새해라니! 양띠가 두 바퀴 돌아 스물 넷, 딸아이의 해가 되었다. 어디서 밥이 끓는지 죽이 끓는지 컴퓨터 게임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게 아무리 봐도 물정모르는 철부지다. 뭐에 씌어 그 나이에 나는 시집을 갔을까. 깔끔하신 시어머님 성정 덕에 첫 시집살이는 고달팠다. 그 양반은 부엌의 세간이든 집기든 반질거리지 않는 꼴을 못 보셨다. “가스레인지가 뜨거울 때 행주로 훔치련” 행주가 손에서 떨어질 새가 없으셨다. “건초도 해가 있을 때 말리라”는 서양속담처럼, 신기하게도 스테인리스 철판이 달궈졌을 때 닦으면 묵은 기름때까지 말끔하게 닦였다. 고부지간 공동가사구역이었던 주방에 평화무드가 깃들기 시작한 건 시집살이 십여 년이 흘러 시모께 노안이 온 후였다. 언제부턴가 잔소리가 잦아드셨는데 흐릿한 시력이 내 게으름의 허물을 덮어주었던 것이다. 기계장치가 아닌 인간관계에서는 똑 부러지게 완벽하다는 것이 오히려 결함으로 작용하는 듯싶다.
이 칼럼에 졸문을 써온 지도 3년이 되어 간다. 글 쓰는데 가장 필요한 덕목은 뻔뻔스러움인 것 같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자료를 뒤지다 보면 나와 다른 의견이 어찌나 많은지, 내 자신의 지식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절실히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지적 능력은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알 수 없다고 느끼는 데 쓰인다.”고했던 프랑스 작가 알랭 로브그리예의 말에 일말의 위로를 받게 되는 까닭이다. 글쓰기는 골프와 닮았다. 매번 의도한 대로 굴러가 주지 않는 것도 그렇고, 힘을 빼야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도 그렇다. 뼈아픈 사실은 실력이 탄탄해야 힘을 뺄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첫 홀 티잉 그라운드에 섰을 때처럼 새해 이런 저런 구상을 해 보지만, 예기치 못한 일의 연속에 잘해보려고 기를 쓸수록 꼬이기 십상인 것이다. 우리가 완벽한 족속이라면 매년 정초에 새 결심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어미 곰과 새끼 곰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어미 곰이 새끼에게 꿀을 먹이려고 바위 사이로 기어 올라갔다가 바위가 굴러 떨어져 죽고 만다. 밤이 되자 새끼 곰은 어미가 죽은 줄도 모르고 어미의 품에 파고들어 잠이 든다. 아침이 되어도 어미가 움직이지 않자 새끼 곰은 혼자 길을 떠난다. 어미 잃은 설움도 잊은 듯 줄레줄레 정글의 세계로 걸어간다. 인간의 정글에도, 비행기 실종, 페리 화재, 에볼라 확진…, 죽음의 행렬은 끝이 없다. 그래도 여전히 승객을 가득 실은 비행기는 상공을 날아오르고, 섬과 섬을 잊는 여객선은 거친 파도를 가르고, 도심의 연인들은 생기에 넘친다. 아기 곰이 그랬듯이 우리도 열심히 새해를 살아가는 수밖에. 인터넷에서 지덕체란 지랄, 덕후, 체지방을 일컫는다는 글을 읽었다. ‘덕후’의 뜻은 ‘하나에 꽂혀 열중하는 것’쯤 되는 모양이다. 더 늦기 전에, 올해에는 체지방도 늘리고 덕후가 되어 지랄도 좀 떨어볼까? 그런데 무슨 덕후가 된다? / 나 순 (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