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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역사탐방] 근세 캄보디아
캄보디아 왕정의 주도권을 얻기 위해 계속되는 전쟁을 했던 태국과 베트남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고 1845년 종전협상을 하였다. 1847년 베트남은 관리들을 모두 철수하였고 오랜 시간동안 태국에 있었던 찬 왕의 동생 두엉이 태국의 후원 하에 왕이 되었다. 두엉이 왕이 된 후 13여년간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태국이 간섭하기는 했지만 정치적 결정권은 왕에게 있었다. 왕은 전쟁기간 동안 황폐해진 사원을 복원하고, 법률체계를 확립하고, 전통문학을 다시 교육시키는 등 왕국의 재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왕국을 방문한 프랑스 선교사들을 환영하였다. 1850년대 말에 프랑스에 보호 요청을 하려는 시도를 했었지만 실패하게 되었고 태국의 고문관들의 감시를 더 강화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두엉 왕은 1860년에 사망하고 ‘노르돔’이 그의 후계자로 들어선다.
프랑스의 진출은 18세기 중반 선교단이 우동지역에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활동하면서 캄보디아 정부와 우호적인 교류를 하였다. 태국 관리들에 의해 두엉 왕의 보호 요청이 좌절되었으나 그쯤 프랑스도 캄보디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학자인 ‘앙리 무오’가 폐허가 된 앙코르를 발견하고 캄보디아가 과거에 크게 번성하였던 사실이 유럽에 알려질 때쯤이었다. 당시 베트남 점령 중에 있었던 프랑스는 1859년 사이공을 점령하고 인도차이나 전역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군사탐험대를 보낸다.
1860년 캄보디아는 두엉 왕이 죽고 정치적 혼란과 베트남에서 우동으로 들어온 참족의 폭동으로 어수선한 상태였다. 두엉의 후계자였던 노르돔은 친태국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참족과 베트남 국경지역으로부터 적대감을 사게 되었고 결국엔 폭동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노르돔은 태국으로 피신하였다가 그 다음해 태국의 보호 하에 캄보디아로 돌아온다. 계속되는 태국의 간섭에 질린 노르돔은 프랑스와 협상에 나선다. 노르돔은 1863년 우동에서 프랑스 해군 대표와 보호 조약을 맺는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의 왕 노르돔과 왕정을 보호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채벌권과 광물탐사권을 갖게 되는 조약이었다. 노르돔은 이 조약을 태국 고문관들에게 비밀로 유지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문관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방콕의 조정에 들어가자 노르돔은 태국의 조정에 충성하는 것을 맹세하였다. 태국 또한 이러한 사실을 프랑스에 비밀로 한다. 이렇게 왕은 양쪽 국가에 충성을 맹세한 채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 글 : 박근태(왕립프놈펜대학 크메르어문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