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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이 보는 세상] 가지 굽는 여인
한국인의 시각을 지닌 채 캄보디아 지방을 다니다 보면 드문드문 비어 있는 땅들에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다. 일 년 내내 추위라고는 없는 기후를 감안하면 온통 작물 재배가 가능한 황금의 땅으로 보이는 것이다. 모내기를 하고 있는 논 옆에서 수확이 이뤄지기도 하는 풍경을 보노라면 만화영화의 주인공처럼 눈동자가 커진다.
그런 장면에 근거해 단순히 계산하면 삼모작도 가능하다는 답이 나온다. 다모작이 이뤄진다면 적어도 현재 수확량을 훨씬 뛰어넘는 소출(所出)을 얻을 수 있다. 쌀농사가 주요 산업인 이 나라에서 그렇게 거둔 쌀들을 수출하면 외화 보유량이 어렵지 않게 불어난다. 더구나 캄보디아 쌀은 세계 쌀 품질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기도 하였으니 경쟁력도 뛰어나다. 그렇게 생각을 덧대다 보면 땅을 이처럼 놀려두고 있는 여기 사람들이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비슷한 이야기를 은근히 현지인들에게 권해보면 상당수 왜 그래야 하는데 하는 답이 돌아온다. 지금처럼 해도 먹고 살기에 어려움 없는데 그런 욕심 부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철 더운 날씨를 감안하면 그런 농법은 지나친 욕심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보통의 중학생 쯤 눈높이에서 나폴레옹을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전 유럽을 상대로 혁명의 정신을 전파한다며 전쟁을 벌여 거듭된 승리를 거둔 사실도 대개는 안다. 그를 위인으로 여기든 아니든 그 정도는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게 한국에서는 정상으로 간주된다.
같은 생각 바탕에서 프놈펜 사람들을 만나 나폴레옹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정해보자. 과연 그것에 동의할 현지인들이 얼마나 될까. 모르긴 해도 이모작이나 삼모작을 어째서 해야 하느냐 하는 만큼의 반문이 당연히 나오지 않을까.
우리의 상식이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나폴레옹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필요하며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런데 그것이 왜 필요한지의 설명이 납득되었을 때 그래서 그것을 긍정했을 때 요긴한 쓰임은 비로소 생긴다.
요즘 한국에서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열풍이 부는 모양이다. 아주 거칠게 말해서 인문학이란 인간에 대한 관심이며 학문이다. 그러니까 한 집단의 리더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인 학문일 것이며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갖춰 두면 도움 되는 소양이라는 인식이 선행되어 있다.
이런 교양을 기본으로 갖춘 대한민국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구촌 어디에 살든 우리 정도의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밥 먹고 나서의 대화에서 이슬람 국가주의가 무엇이며 어째서 문제가 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아프리카의 애볼라를 걱정하고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가슴아파한다.
하지만 우리의 상식이 세계인의 상식은 아니며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음도 물론이다. 예컨대 나폴레옹은 유럽 여러 나라에 민법의 기초를 제공한 위인이라 할 수도 있으나 전쟁과 탄압의 독재자로서의 그는 전쟁광이기도 하다고, 그런 것을 알아야 한다고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열을 올리는 일은 다소 멋쩍다. 그런 나폴레옹의 모습에서 자신들 정치인에 대입할 수 있는 안목을 먼저 열어준 다음에라야 그들은 자연스레 그것을 수용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소 지저분해 보이기도 하지만 나름의 활기를 느낄 수 있어 주말이면 현지인들이 주로 다니는 벙깽꽁 시장에 자주 간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두리안의 가격이 다른 시장들보다 싸서 좋다. 장사하는 분들의 생생한 삶의 기운을 얻어오는 건 번외(番外)의 소득이다.
우연히 인터넷에 올라온 여행 후기를 보는데 벙깽꽁 시장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이야기가 올라 있었다. 총이라도 가지고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댓글에 많은 현지인들은 소지하고 있을 터이니 그럴 수 있다면 그래야 한다는 답글도 있다. 그 와중에 캄보디아 사람들을 낮추어 보려는 태도의 글들을 여럿 발견한다. 소매치기를 잘하는 짓이라고 할 수야 의당 없지만 사람 사는 모든 곳에 있는 일들이고 그것은 한국도 정도의 차이뿐 다르지 않다.
자신이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사람의 놀라움이야 백번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을 일반화하여 캄보디아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지나친 공포심이나 불쾌감을 심는 것은 삼가야 한다. 경제가 나아지며 벌어지는 필요악적 상황이어서 조심은 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과장할 필요는 없다.
하루는 시장을 돌다가 숯불을 피워 가지를 굽고 있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튼실한 몇 개를 골라 시간 없으니 빨리 구워달라고 했다. 하지만 요지부동(搖之不動),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아무리 보채어도 내 채근에 맞추어 건네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다른 곳을 실컷 돌고 가서도 얼마를 더 기다려야 주문한 개수를 사 올 수 있었다. 그 프로정신에 새삼 놀라면서 나도 모르는 새 몸에 배었을 이들을 낮춰 보려는 내 태도를 반성했다. 대충 달라 해도 자신 눈썰미 맞을 때까지 굽고 껍질을 벗겨 주는 일관된 태도는 참으로 감동이었다.
미리 흥정하는 건 이곳 시장의 불문율이라 주문량의 값이 3달러임을 굽기 전에 물어 알고 있었다. 일삼아 다시 묻는데 내 귀에 ‘파이브 달라’로 들린다. ‘이게 무슨 짓!’ 성마른 나는 바짝 흥분했는데 알고 보니 실정은 이랬다.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그녀는 달러의 현지 발음 ‘돌라’에 ‘삼’을 뜻하는 현지어 ‘바이’를 붙여 말한 것이었다. 그러니 ‘오’로 들은 건 혹 바가지 씌우는 건 아닌가 하는 내 선입견이 부른 공연한 오해였을 뿐이었다.
잔잔한 미소로 준비해간 통에 주문량을 채워 건네던 그녀의 입이 어느 날 “쓰리 돌라”라고 발음했다. 영어로 말하지 않던 그녀가 내 귀를 배려해 연습하였을 걸 생각하자 가슴이 먹먹했다. 캄보디아 프놈펜 벙깽꽁 시장에도 착하고 책임감 있는 프로정신의 소시민들이 살고 있다.
한유일(교사) shiningday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