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나무 너머로 한가위 달이 휘영청…

기사입력 : 2014년 10월 01일

남편이 가끔 캄보디아 동화를 들려준다. 다 쓰기도 전에 잊어버리는 그림 같은 산스크리트어에 질려 나는 애시당초 포기했으나 그는 수년째 캄보디아어를 익히고 있다. 이제 제법 늘었다지만 남편이 구사하는 크메르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마누라뿐이다.(외계 언어로 말한들 못 알아먹을까 만은…) 어쨌든 요즘 동화읽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화제가 궁하기로 그 연식의 부부가 동화타령이냐 싶을지 모르지만, 캄보디아 전래동화의 결말만큼 독특한 것도 드물다.

얘기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한 땅꾼이 독사 굴 앞을 지나는데 독사에게 물려 다 죽게 된 호랑이가 도움을 요청한다. 다급한 상황이라 약초에 침을 뱉어 이긴 후 상처부위에 발라 준다. 죽었다 살아난 호랑이가 고마워하기는커녕 감히 맹수의 왕에게 침을 뱉었다며 그 사람을 잡아먹으려 든다. 궁지에 몰린 땅꾼은 영리한 토끼를 찾아가 공정하게 심판해 달라고 부탁한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정황을 짐작한 토끼는 사건을 처음부터 재현해 봐야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꼬드겨 호랑이를 다시 독사 굴로 들여보내 죽게 만든다. “동화”하면 “해피엔드”로, 호랑이를 잘 타일러 잘못을 뉘우치게 해서 다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을 맺기 십상인데 캄보디아 동화는 이처럼 결말이 잔인한 게 많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하면, 물에 다시 빠뜨려 죽여 버리는 식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어린이들에게 잔인한 복수의 법칙을 가르치자는 것인가, 섬뜩한 느낌이 든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인간의 얄팍한 심리를 간파한 게 아닌가 싶다. 은혜를 모르는 인간은 개선자체가 불가능하니 그대로 되갚아줘야 마땅하다는 인식이 캄보디아인의 전통적인 정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과거의 처지를 잊어버리는 우리네 망각 본능은 못 말릴 정도다. 고국에서의 이력이 한층 화려하게 기억되는 이민자들에겐 더하다. 순풍에 돛단듯 인생이 잘 풀려나갔다면 고국을 떠날 일도 없었으련만, 그 시절의 고초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호시절 기억만 붙들고 애면글면하는 것이다. 명절만 다가오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향수병이 도지는 게 이방인의 정서인가 보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그 시절로 보내주마!” 한다면, 나잇살이 늘어진 몸뚱이를 물찬제비처럼 만들어 놓는다 해도 “노 땡큐!”다. 역시 추억이 아름다운 건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리라. 냉정하게 되짚어 보면 그때그때 나름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고통이 사라질 때는 잠에 빠져 있을 때뿐”이라는 말을 루쉰이 했던가, 생각해보면 사람살이가 문제의 연속이고 얄궂게도 고통을 잊게 해주는 건 또 다른 고통뿐인 듯싶다. 부챗살처럼 펼쳐진 바나나 나무 너머 상현달이 어찌나 휘영청 한지, 달빛을 받은 망고잎이 은비늘처럼 반짝인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캄보디아에서 맞는 헐렁한 추석도 나름 좋다. / 나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