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지상의 유토피아

기사입력 : 2014년 0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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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 있는 사람이 종종 알아봐줄 정도의 성취감과 베개에 머리를 대면 이내 잠들 수 있을 만큼의 피로감을 주는 일, 언제든지 청담과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벗, 비우라는 채근일랑 들을 일 없는 소박한 내 집, 잘 익은 술과 그에 어우러진 요리를 장만하는 고분고분한 처(그녀가 매일 바뀌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각자 다르겠지만, 누군가가 그리는 천국의 모습일 수도 있을 테다.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가 구상했던 유토피아 ‘텔렘 공동체’에는 통치자가 없다. <그대가 하고자 하는 것을 행하라>가 바로 그들의 모토다. 일도, 사랑도, 놀이도, 휴식도 마음이 동할 때 한다. 힘든 일은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 맡긴다. 그 공동체가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까닭은 거주자를 선별하기 때문이다. 혈통 좋고 정신이 자유롭고 교양 있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선남선녀로서 여자는 열 살, 남자는 열두 살이라야 들어 갈 수 있단다.(선만 모아놓은 것이 악만 모아놓은 것과 뭐가 다를까만) 한 번 보아버린 것을 물릴 수는 없는 법, 십대 초반을 넘기면 권력과 탐욕 따위 인간 본성에 눈 떠 유토피아 공동체 구성원으로는 가당치 않다는 의미일까. 일반화하기엔 무리지만, 캄보디아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향은 불로소득자의 생활에 있는 듯싶다. 물려받은 재산이 많다든지 부동산 임대업을 한다든지, 빈둥거리며 먹고 사는 인생을 최고로 친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듣게 되는 것을 보면.

우리는 행복을 떠올릴 때, 변함없는 사랑과 우정 속에 의식주가 보장되는 확고하고 항구적인 상태를 생각한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 처방을 받고 연일 미인에 둘러싸여 술이 연못을 이루고 숲이 고기를 이루는 주지육림의 생활을 하더라도 그 쾌감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건 확실하다. 자신이 부자라서 행복했던 게 아니라 부를 이루는 희로애락의 과정이 행복했다며 재산전액을 기부했던 어떤 갑부얘기도 있듯이, 행복은 지속적인 상태보다 문제를 해결해 가는 삶의 여정에 있는 모양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수면상태에서 진정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 패배를 맛보게 마련이라더니, 새삼 죽음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이건희 회장은 행운의 사나이다. 선대의 유산으로 많은 것을 선점한 상태에서 삼성을 세계 기업으로 끌어올린 걸출한 모험까지 했으니.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사람 중 인생관을 180도 바꾼 사례는 무수히 많다. 사망설, 위독설 등 루머가 일파만파지만 꼭 털고 일어나시기 바란다. 인간적인 정리로서도 그렇거니와 캄보디아 1년 예산에 달하는 그의 재산으로 못할 일도 없을 듯한데, 동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후 이야기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설마 후계자 굳히기, 치부 ․ 탈세방법 전수 따위로 세월을 허비하지는 않으리라. 한 부호는 죽기 직전에야 그랬다지, “전에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세간의 시선 때문에 돌보지 못했다. 그 여인을 찾아 이것을 전해다오.” / 나순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