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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역사탐방] 앙코르 시대 생활상
앙코르 시대의 역사적 자료는 산스크리트어나 고대 크메르어, 팔리어로 비문에 새겨져 있으나 발굴된 자료가 많지 않고 기록된 내용 또한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것들이었다. 이러한 자료적 한계 속에서 크메르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던 것이 주달관의 견문록인 ‘진랍풍토기’이다. 주달관은 1296~97년에 중국 사신의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캄보디아에서 거의 일년을 체류한 후, 귀국하여 견문록의 집필을 1312년 이전에 끝낸 것으로 보인다. 그의 견문록을 통해 앙코르의 생생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묘사한 앙코르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거칠고 피부가 검었으며, 왕궁에서 생활하는 궁인들과 관리의 부인들은 대부분 옥과 같은 하얀 피부를 가졌다. 아마 햇빛을 받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천으로 허리를 감싸는 것 이외의 남녀의 구별은 없었으며, 가슴은 노출시키고 상투를 틀고 맨발로 다녔다. 국왕은 다섯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정실에 한 명, 왕궁의 동서남북 끝에 있는 거처에 네 명의 부인이 기거한다. 그리고 그 밑에 첩과 궁녀들이 3천명에서 5천명이 있다. 국왕은 금관을 쓰고 간혹 쓰지 않을 때는 쟈스민 향과 비슷한 향이 나는 향류를 머리카락 사이에 바른다. 정수리에는 세 근이나 되는 진주를 얹고 다니며, 손목과 발목 및 손가락에는 팔찌와 금반지를 하고 거기에 모두 묘안석을 박아 장식하였다. 국왕도 맨발로 다녔으나 발과 손에는 홍약으로 붉게 염색하였으며 외출할 때는 금으로 만든 칼을 들고 다녔다.
일반인의 소송사건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국왕 앞에서 다루어진다. 형벌은 단지 벌금형만 있었으며 큰 죄를 지었어도 사형은 없었고 죄인을 구덩이에 넣은 다음 흙과 돌을 쌓아 올리는 벌을 주었다. 그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는 벌 등이 있다. 길거리에 죽은 자가 있어도 성 밖의 들판에 버리고, 시체에 대한 상세한 조사와 검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훔쳐갔다는 의심이 드는 자가 자백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끓는 기름 속에 손을 넣게 한다. 만약 물건을 훔쳤으면 손에 화상을 입고, 결백하다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데 이것은 ‘신의 판결’로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면 신이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온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관은 없고, 둥그런 대나무나 돗자리 종류로 시체를 덮고 천으로 감싼다. 시체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성 밖의 시골에 내놓은 뒤 동물들이 다가와 먹는 것을 기다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짐승들이 먹어치우면 죽은 자의 부모에게 복이 돌아온다고 믿는다. 만일 먹지 않거나 먹다가 중단하면 부모는 오히려 죄를 지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죽었을 때는 특별한 상복은 없으며 남자는 머리를 삭발하고 여자들은 동전 크기만큼 앞머리를 자른다.
주달관은 중국이 캄보디아로부터 공물을 받기 위해 1295년에 중국 조정에서 파견한 사신단의 수행원으로써 캄보디아가 가장 번영했던 시기에 방문했으며 그가 묘사한 도시는 자야바르만 7세의 왕도, 즉 현재의 앙코르 톰과 일치한다. / 글 : 박근태(왕립프놈펜대학 크메르어문학과 3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