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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칼럼] 연민
팔순 노모께서 보고 싶어 하신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나, 흉허물 없이 내왕하며 지내던 지기들이 그리울 때면, 물설고 낯선 이국땅에서 뭐하고 있나 싶어져 서글픈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나이 들어가면서 사회 불의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은 둔해지는 반면 자기연민 같은 추레한 감정은 더해가는 듯도 싶다.
옛 지인 중에 가진 것 없이 결혼하여 군색한 형편 때문에 걸핏하면 부부싸움을 하던 여인이 있었다. 하루는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다퉜는데 불똥을 피하려던 남편이 휙, 돌아눕는다는 것이 신혼방이 워낙 비좁다보니 코를 벽에 찧어 코피가 터지고 말았다. 가난도 서러운데 구박까지, 남편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그 이후 그녀는 잘 사는 부모덕을 본 친구들보다 많은 부를 일구었는데 그 간의 사연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남편에 대한 연민이 그녀를 분발하게 했던 모양이다. 사람은 대체로 어려운 상황에서 더 많은 것들을 해낸다고 한다. 가난이나 위기, 장애 등 약점이 때로는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영화 ‘마지막 4중주(A Late Quartet)’를 보았다. 한 쌍의 부부와 친구, 스승으로 이루어진 세계적인 4중주단이 결성 25주년 기념공연을 앞두고 있다. 멤버 중 가장 고령인 스승이 파킨슨병 판정을 받으며 전환점을 맞게 된 팀은 갈등을 겪게 된다. 25년 내내 제2바이올린만 켰던 남편이 아내에게 그동안 쌓인 불만을 토로한다. 이 시점에서 메인인 제1바이올린 연주를 맡아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치고 싶다며 아내의 지지를 구한다. “그건 당신의 에고라고, 제기랄!” 비올리스트인 아내는 우리 팀은 그동안 각자의 재능과 실력에 따라 공정하게 움직여 왔다며 완강하게 거부한다. 진실을 직시하는 일은 슬프고도 오싹한 일이지만, 예술에 있어 ‘천재적인 사람’과 ‘욕망이 간절한 사람’ 간의 간극은 크다. 남편에 대한 연민 따위로 팀의 예술성에 흠집을 낼 수 없다는 “냉철”이 25년 동안 세계 톱의 권위를 고수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나 싶은 대목이었다.
사람이 애처로운 감정을 느낄 때가 가장 순수하다. 타인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인류존립의 근간인 것이다. 세계적으로 원조와 봉사의 손길이 끊이지 않는 캄보디아는 최고 인류애 수혜국인 셈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각계각층의 국민이 점점 도움에 길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물자 아까운줄 모르고, 원조에 조건을 달기도 할뿐더러 봉사활동을 거부하고 대신 현금을 요구하는 축도 있다. 생텍쥐페리는 거지에 대한 연민으로 피부병을 치료해 주었는데 말끔한 거지에게는 적선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거지가 돌아서서 제 몸을 해코지하는 장면을 보고, 연민의 정이 인간의 정도(政道)를 그르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연민에서 우러난 행동만큼 아름다운 일도 없을 테지만, 자유 의지를 꺾을 수도 있고, 타성에 젖게 할 수도 있고, 인격적인 비하감을 줄 수도 있어, 그르치지 않게 행하기도 쉽지 않을 성싶다. / 나순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