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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칼럼] 슬픔에 대하여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가을날 비는 처량하게 내리고 그리운 이의 인적은 끊어져 거의 일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학창시절 한번쯤 매료되었을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다 돌아와 그 수다의 향연 갈피에서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어쩔 수 없이 슬퍼진다. 얘기가 다 끝나갈 즈음에야 몇 차례 반복해온 화제였음을 떠올리고는 기억력의 쇠락을 쓸쓸해하는 눈동자,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안목만 높아져 이도저도 못마땅해 이죽거리는 입술, 미각은 오로지 호시절에만 머물러 입맛 돋우는 게 없나 연신 깨작대는 젓가락…, 어느덧 인생의 가을이 깊어가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뿐이랴?
어떤 영화였던가, 훌쭉 마른 남자가 심야버스에 올라 차창 밖을 내다본다. 왁자하게 휩쓸고 간 텅 빈 거리에서 쓰레기를 뒤지는 아이들, 블라우스 앞자락을 슬쩍슬쩍 들춰 가슴을 내보이며 남자를 유혹하는 소녀, 몸뚱이 하나가 밑천인 여자에게 완력을 휘두르는 사내, 태평스런 얼굴에 껌을 질겅이며 마약을 파는 꼬마…, 프놈펜에서는 대낮에도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남자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는다. 가련하고, 속되고, 어리석고, 잔인한 인간군상에 감정이 복받친 모양이다. 석가나 예수 같은 성인(聖人)의 보편적인 사랑과 비견될 수 없더라도 예민하고 다감한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한 배를 타고 고해(苦海)를 건너는 동족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랄까. 남들이 못 느끼는 것을 홀로 느끼는 일 또한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지독한 슬픔이리라.
혹자는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해야 한다면 “슬픔”쯤 될 것이라고 한다. 하나 둘 익숙해진 것들과 이별해야하는 나이이고 보니 마음에 와 닿는다. 평생 끼고 살았던 아들 녀석이 학업을 위해 타국으로 떠났다. 이국땅에서 자식을 기르는 분이라면 학기를 앞둔 이맘때 많이들 겪는 일이다. 갖가지 통신기술에 화상통화까지 지구가 한 동네라고들 하지만, 먹이고, 성내고, 보듬고…, 오감으로 확인하던 새끼의 부재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리라. 이기적인 심보지만, 이제 막 새로운 항해를 떠나는 내 아들에게만은 세상이 우호적이었으면 싶다.
“물에 들어가면 악어가, 뭍으로 올라오면 호랑이가 너를 잡아먹는다.”, 캄보디아 속담이다. 한 고비 넘겼다싶으면 또 다른 고비가 기다리는 게 사람살이인 듯하다. 마음속의 악어와 호랑이 때문에 더 오랜 시간 슬픔에 잠겼던 것도 같고. 모친말씀에 따르면 나는 누드로 태어났다고 한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들 녀석도 벌거숭이로 태어났다. 죽을 때도 역시 맨몸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면, 슬픔에 조금은 초연해질 수 있지 않을까. 무릇 슬픔은 기쁨으로 통한다는 어느 경구처럼 열심히 사노라면 찬란한 슬픔에 이를 수도 있지 않을까. / 나순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