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감정

기사입력 : 2013년 07월 22일

감정1

질 들뢰즈는 “영화는 새로운 사유기계다.”라고 말한다. 난해한 문체로 정평난 이 프랑스 철학자의 심오한 경지까지는 모르겠지만, 각양각색인 타인의 인생을 엿보면서 차마 저지를 수 없는 행동에 대한 대리만족과 대리슬픔을 경험하기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유꺼리를 떠안게 되기도 한다.

“감정(Les Sentiments, 2003년 베니스영화제)”은 흔하디흔한 불륜영화다. 의사로서 부와 지위가 보장된 중년남자가 있다. 하마처럼 축 처진 입, 늘어지기 시작한 뱃살, 오래된 결혼과 일, 루틴해진 생활은 무신경과 히스테리로 점철된다. 어느 날 후임의사 부부를 섭외해 정원이 통하는 옆집에 들인다. 갓 결혼한 새댁의 등장으로 회색빛 모노톤의 인생이 짙푸른 초원에 꽃들이 만개한 듯 총천연색으로 바뀐다. 일과 일상을 공유하게 된 두 부부는 자연스레 어울리게 된다. 심리학자 메종뇌브는 인간의 감정을 “인생의 여러 상황에 따라 누구나 겪게 되는 강력하나 표현하기 어려운 내적 상태”로 정의했다. 아무래도 감성을 최고조에 이르게 하는 것은 ‘연애’일 터이다. 채워진 술잔, 하늘거리는 원피스, 수줍은 웃음, 슬쩍 교차되는 눈길, 모른척할 때의 긴장…, “나는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요. 인생을 지나치게 사랑하게 되면 약해지고 말죠.” 규칙을 알지 못하는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편은 그것과 거리를 두어야한다는 젊은 남자의 의견 따위에 아랑곳없이 불륜에 빠지고 마는 중년남자와 젊은 여자, 숨겨야할 관계만큼 자극적인 것이 없으니 틈만 나면 서로를 탐닉하기에 이른다. 죄책감은 잠시, 오로지 감정에 충실해 성애에 집착하는 성인남녀의 관능과 나머지 두 배우자의 우스꽝스러운 처지가 서글프게 다가왔다.

어떠한 희생도 치르려 하지 않는 열정이란 사소한 곤경에도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밀애를 들킨 젊은 여인은 거짓말처럼 냉정을 되찾아 남편에게 애걸복걸하여 함께 떠나버린다. 천진한 아내의 철딱서니 없는 불장난 연기를 멋지게 해낸 ‘이자벨 까레’처럼 남자들은 백치미에 이끌리지만, 내가 아는 한 아무리 어린 나이라도 사랑에 있어 백치인 여자는 없다. 연애에 있어서나 연인을 지키는데 있어 그녀들은 모두 천재인 까닭이다. 반쯤 넋 나간 아내, 주눅 든 아이들, 엇갈린 정열이 쓸고 간 진창에 남겨진 남자는 사랑하던 여인의 창을 바라본다. 석고 같은 중년사내의 가슴 어디에 그런 눈물이 숨어있었을까, 남자는 흐느낀다. 유리잔, 식기류, 포도주창고…, 부서지기 쉬운 인생을 은유하듯 유리소품이 많이 이용되고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이 영화는 선을 넘은 주인공의 사랑놀음보다 저마다 은밀하게 간직한 채 살아가는 에로티시즘을 희화화해 배경음악처럼 처리한 발랄한 연출이 돋보인다. 어쨌거나 우리가 와인글라스에서 특별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유는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거뜬히 지탱하고 있는 가느다란 손잡이의 우아함에 있지 않을까.  / 나순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