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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뽓 베이비”, 50년 후 크메르루즈 점령기 삶을 회고
▲크메르루주 S-21 수용소 수감자들의 사진과 함께 있는 싸란 누언 씨
싸란 누언(50세)은 RFA(자유아시아방송) 수석 매니저로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가 침공한 날 전기 끊어진 바탐방주 우정병원 산부인과 병동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스스로 “전쟁의 아이”라고 칭하거나 “뽈뽓 베이비”로 간주한다. 당시 크메르루주는 전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반대파들을 섬멸하고 수백만 명의 시민들을 도시에서 시골로 강제 이동시켰다. 싸란 누언의 어린 시절은 이처럼 뽈뽓 정권하에 있다가 태국으로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를 장악한 날에 태어난 싸란 누언 씨
크메르루주라고 불리기 전에는 이름도 얼굴도 없던 이 정권은 “앙카르(Angkar)”로 먼저 알려졌다. 도시를 점령할 당시에 시민들을 시골로 쫓아내면서 “앙카르와 함께 할 것”을 외쳐댔기 때문이다. “앙카르”는 뽈뽓 정권 시절 캄푸치아 공산당(‘크메르루주’라고도 함)을 지칭한다. 하룻밤 사이에 앙카르에 대한 충성심이 부모, 가족, 마을이나 지역 사회, 심지어 종교에 대한 충성심을 모두 대체했다. 앙카르에게 불충하다고 판단된 사람들은 “숙청”의 대상이었다.
▲가족의 난민 번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어머니(왼쪽) 옆에 서 있는 어린 소녀 싸란 누언
싸란 누언의 어머니는 출산 후 이틀간 몸조리 후 바로 시골로 쫓겨 가야 했다. 다행히 경운기가 있던 지인이 갓난아기인 싸란 누언과 어머니를 태웠지만,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 머나먼 길을 걸어야 했다. 크메르루즈 침공 전에 풍족하던 시절 복중에서부터 잘 자란 싸란 누언은 태어나서도 제법 통통해서 “뚱뚱한 아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 태어난 싸란 누언의 남동생은 영양실조에 시달렸고 깡말라 있었다.
▲캄보디아 쯩아엑 학살 박물관에 전시된 크메르루주 희생자들의 두개골
한편, 싸란 누언의 할아버지는 정치에 깊이 관여한 탓에 1975년 크메르루주가 권력을 잡자마자 캄보디아를 탈출했다. 크메르루즈의 눈을 피해 나라를 떠나는 데 두 달이 걸렸지만, 먼저 태국으로, 그다음 미국으로 가서 이후의 참혹한 학살을 피했다. 당시 수십만 명의 지식인, 도시 주민, 구정부 지도자들과 하급 군인, 경찰관, 공무원이 크메르루즈에 의해 살해됐다. 전국 농촌 지역의 대량 무덤에 시체가 버려졌는데, 이를 “킬링 필드”라고 불렀다.
▲1975년 프놈펜에서 뽈뽓(오른쪽), 중국 대사 쑨하오(가운데), 외무장관 렝싸리(왼쪽)
1980년, 다섯 살이 된 싸란 누언은 증조할머니가 입혀준 스커트를 입고 계속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삼촌이 싸란 누언을 등에 업었고, 어머니에게는 한 살 반 된 남동생이 업혀 있었다. 그들은 자전거와 도보로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다가 국경에 가까워졌다. 가져간 금으로 태국 국경까지 안전하게 가는 방법을 아는 가이드를 고용했다. 국경은 태국 군인들이 총을 쏘며 죽이려 했고, 지뢰도 있어서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를 향한 그들의 마지막 발걸음은 밤에 이루어졌는데, 다섯 시간이 넘게 걸린 여정이었다. 때로는 아기 울음소리에 모두가 들킬까 봐 어머니와 삼촌 식구들이 헤어지기도 했다. 어머니, 남동생, 숙모, 삼촌, 그리고 두 사촌과 함께 그들은 마침내 태국 국경의 난민 캠프 안으로 안전하게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할아버지의 직접적인 후원을 받아 미국 최초의 정치적 망명 허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RF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