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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더 알아보기] 제179화 앙두엉 왕가의 직계 존비속
▲현 노로돔 시하모니 왕의 현조부인 앙두엉 왕의 사리탑
지금 캄보디아의 왕은 노로돔 시하모니(재위 2004-현재)이다. 그는 캄보디아 헌법(1993년 제정)에 정한 왕가의 후손으로 국왕선출위원회의 심사를 통해 선출됐다. 왕으로서 국가 원수의 지위를 유지하되, 헌법 제7조에 명시된 바대로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조항에 따라 국정 권한은 없다. 캄보디아에서 왕의 존재 가치는 실권자 훈센 총리가 국가 안정의 열쇠라고 언급한다. 이에 따라 국가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자리 보존은 계속될 전망이다.
헌법에서 왕으로 선출되는 왕가는 앙두엉 왕가, 노로돔 왕가 및 시소왓 왕가이다. 앙두엉 왕가의 시조는 앙두엉 왕(재위 1840-1859)으로, 그가 재위하던 19세기 캄보디아는 극도로 쇠약해서 태국(당시 ‘시암’)과 베트남의 공동 속국이었다. 앙두엉은 친태국파로서 친베트남파이자 자신의 조카인 앙메이 여왕(재위 1834-1847)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당시 태국과 베트남에 상당한 영토를 떼어줬는데 대신 안정기를 맞아 국가를 재정비할 수 있었다. 큰 결실은 보지 못했어도 오늘날은 당시를 앙코르제국 시대에 비할 황금기로 미화한다.
노로돔 왕(재위 1860-1904)은 앙두엉 왕의 장남으로 프랑스 식민지를 공식화한 왕이다. 현 국왕의 성이면서 노로돔 왕가의 시조이다. 문헌에 따르면 그는 슬하에 27명의 왕자와 34명의 공주를 두었다고 하며, 이들의 이름은 모두 ‘노로돔’이라는 성을 수반한다. 이를 두고 캄보디아인이 공식적으로 성과 이름자를 함께 쓰기 시작한 역사를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노로돔 왕대부터라고 한다. 한편 앙두엉 왕의 또다른 아들들이자 노로돔 왕의 이복형제로 시소왓과 시워타가 있다.
▲현 국왕의 아버지인 노로돔 시하누크 왕의 19세 당시 모습
이들 형제는 우애가 좋지 않았는지 장남인 노로돔이 왕세자로 정해졌어도 부왕 사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노로돔과 시소왓이 태국에 있는 동안에 셋째였던 시워타가 프놈펜 왕궁에서 쿠데타를 시도한 것이다. 이 바람에 노로돔은 프놈펜이 아닌 우동 왕궁에서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아무튼, 태국의 명령에 따라 형이었던 시소왓이 시워타와 그 무리를 진압했다. 그리고 노로돔 왕 사후에는 시소왓 왕(재위 1904-1927)이 등극해서 아들 시소왓 모니웡 왕(재위 1927-1941)에게 자리를 승계했다.
현 왕의 부왕은 노로돔 시하누크 선왕(1차 재위 1941-1955, 2차 1993-2004)이다. 그의 부친은 노로돔 쏘라머릿 왕(재위 1955-1960)으로 노로돔 왕의 아들이다. 노로돔 시하누크가 아버지를 제치고 19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은 프랑스 식민 정부의 꼭두각시가 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역사에서 보듯이 식민지를 종식하는 데 앞장섰고 독립 후에는 왕위를 부왕에게 이양하고는 정계 실세로 군림하면서 입헌군주제를 시험했다. 냉전(1947-1991) 시기에는 공산주의 진영과 민주주의 진영 둘다에서 국익을 취했다. 지금의 훈센 총리는 그러한 노로돔 시하누크 왕을 흠모해서 군인이 되었다고 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앙두엉 왕의 선대는 어떠한 경로로 왕이 될 수 있었을까? 앙두엉 왕의 부왕은 앙엥 왕(1차 재위 1779-1782, 2차 1794-1796)으로 태국의 후원으로 6세와 21세에 1~2년씩 즉위했다. 그의 부왕은 오떼이 2세 왕(재위 1758-1775)으로 베트남의 꼭두각시 왕이었다. 선대 왕은 할아버지인 앙통 왕(1차 재위 1748-1749, 2차 1756-1757)인데, 왕가의 혈통이 아니다. 톰마 리어찌어 3세(1차 재위 1702-1705, 2차 1707-1714, 3차 1736-1747) 왕의 사위였는데, 왕위 쟁탈전에서 왕자들을 무찌르고 왕좌에 입성했다.
지금까지 노로돔 시하모니 왕의 직계존속을 부계 중심으로 확인했다. 국력이 약했던 암흑시대(1431-1863)에 “앙통-오떼이 2세-앙엥-앙두엉”, 프랑스 식민지 시기(1863-1953)와 근현대에 “노로돔-노로돔 쏘라머릿-노로돔 시하누크-노로돔 시하모니”로 이어진다. 초기의 왕들은 태국과 베트남의 등쌀에 왕위가 불안정했다. 결국은 위태로운 왕권의 사수를 위해 프랑스 식민지를 자처했다. 독립 후에는 영민한 왕이 외세를 주무르고 정계를 주도했다면 오늘날은 걸출한 신권이 우위를 점해서 왕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글 이영심
前 왕립프놈펜대학교 한국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