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한인 선교사 이야기] 제 3 화 임세종 태권도 교관의 캄보디아인 고아 사역

기사입력 : 2020년 07월 17일

800 1▲ 사역 당시의 임세종 교관

캄보디아에 와서 복음을 전한 한국인 중에서 특별한 예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임세종 태권도 교관, 그는 교회나 선교단체로부터 파송 받은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캄보디아에 오게 되었고, 그 우연한 기회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음과 동시에 수많은 캄보디아인들의 삶 또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임세종 교관은 일본 강점기였던 1941년 11월 17일, 황해도에서 태어났으며, 1950년 6·25 동란을 피해 월남(越南)하던 중, 가족과 헤어지면서 고아로 자랐다. 몇 년 뒤, 가까스로 가족을 만났지만, 그의 기억 속의 고아라는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3년 공군 복무를 마쳤으며, 그 기간 중 미8군 병사를 알게 되어 낙하산 강하 훈련 및 영어를 습득하였고, 무엇보다 그는 어머니의 전도로 1967년, 만 26세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로부터 4년 이후인 1971년, 그는 ‘전쟁 중인 베트남 미8군에서 민간인 군사 기술요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하였으며, 불과 몇 주 뒤, 합격과 함께 김포공항을 떠났다.

그가 베트남 사이공 미8군 소속의 태권도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만난 이들은 베트남인 군인도 있었지만, 캄보디아인 군인이 더 많았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캄보디아 론놀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1973년 2월 28일, 캄보디아 프놈펜에 도착하였다. 그때 프놈펜은 이미 크메르루주 군이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이런 상황이었기에 론놀 대통령과 측근의 무관들은 임세종 교관에게 태권도 교육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그즈음, 고국에서 어머니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지만 진정한 신앙심이 없었던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왔으며, 그는 전쟁 중, 고국의 어머니가 어렵게 보내준 성경을 읽으면서 거듭나게 되었고, 거듭난 그는 캄보디아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며, 고아였던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두 명, 서너 명 그렇게 불러서 교육과 함께 돌본 고아가 150여 명 되었고, 나중에는 ‘Angel’s Christian Orphanage (천사의 집)’라는 고아원을 열였다. 이 사역은 월드비전, OMF와 C&MA의 도움을 받았으며, 한때 그의 신분과 사역을 의심하고 한국으로 송환하려던 재캄 대한민국대사관에서도 물질적인 후원을 하였다.

주일에는 이 고아들과 인근 지역 주민들 500여 명이 예배를 드렸는데, 자연스럽게 당시 캄보디아에서 집회 인원이 가장 많은 교회가 되었다. 특별히 고아원이 있는 지역의 많은 주민과 어린이들이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임세종 교관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울 때에는 캄보디아인 교회의 목사나 외국인 선교사를 초청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예배당 없이 고아원에서 예배드리다가, 예배당 건축이 필요하여 기도하던 중, 미국 화이트 목사 사모 임종 시의 유산 미화 3,000불을 캄보디아 주재 월드비전을 통해 전달받았다. 예배당 건축 후에는 매 주일 예배드리는 인원이 700명을 넘어섰다. 전쟁의 포화가 자욱했던 1974년 12월 25일, 임세종 교관은 군인과 민간인을 대상으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열어 수많은 영혼을 주님에게 돌아오도록 안내하였다.

800 2▲ 임세종 교관의 자서전 “캄보디아의 반딧불” 표지

 

1975년 3월 31일, 임세종 교관은 모친 위독의 연락을 받고 급거 귀국하였으나 그의 어머니는 기적처럼 일어났고,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오려던 임세종 교관은 폴폿 군대의 프놈펜 함락으로 입국할 수 없었다. 대신 태국의 난민촌으로 가서 구제 사역을 하였으며, 1982년과 1987년, 자서전 “무엇으로 이들의 아픔을”, “킬링필드의 반딧불”을 출판하였다./장완익 선교사 (KMAC 역사연구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