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망고예찬

기사입력 : 2013년 01월 30일
mango 33 

“보름달 안에 초승달이 여러 개 들어있는 것은?”, 귤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던 60년대 수수께끼다. 감귤나무 몇 그루만 있으면 자식 대학교육까지 시킬 수 있다하여 대학나무라 불렸던 시절이다. 난생 처음 귤을 먹었을 때처럼 망고를 처음 맛봤을 때 느낌을 어찌 잊으랴. 캄보디아에서도 망고나무로 대학학비까지 마련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망고만큼 사랑받는 과일도 없으리라. 인간에게 원죄의 덫을 씌웠던 에덴동산의 사과가 굴레의 상징이라면, 캄보디아의 망고는”희망은 어떤 모습일까?”, 희망의 현현(顯現)이다. 때 국물이 줄줄 흐르는 낡은 구호셔츠바람의 망고장수아저씨, 광주리에 높다랗게 쌓인 노오란 망고 성채는 가난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나니, 한 점 구김살 없는 낙천주의 그 자체다.

망고를 즐기기에 앞서 집도를 앞둔 의사의 심정으로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잉어새끼처럼 미끈하고 청포묵처럼 연약한 농익은 망고를 다룰 방도란 온통 손의 촉감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막 옷을 벗으려는 여인, 망고의 모습이 눈부시다. 비와 바람과 햇빛이 여린 가지에 매달린 맨몸 위로 숱하게 미끄러져 내렸으리라. 아름답고 가련한 것 앞에서는 무뢰한이라도 조신해지는 법, 하지만 우리의 슬픈 인연을 어쩌랴. 먹이감을 삽시간에 제압했던 전쟁영웅의 전술에 의하면,”먼저 강하게 때려라. 그리고 때리기를 멈추지 말라”고 했거늘. 날을 세운 단도로 정수리를 내리쳐 망고의 두피를 단번에 갈라야 한다. 벌어진 틈을 기점으로 날씬한 후미를 향해 조심스레 외피를 벗겨 내려간다. 연장을 댈 것도 없이 스스럼없이 껍질을 벗어던지고”날 잡아 잡수쇼”하는 헤프디헤픈 바나나와 달리, 섬유질이 풍부한 망고의 저항은 완강하기 때문이다.

전라(全裸)가 되었을 때 가장 조심할 일이다. 망고는 핵과(核果)로서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다. 무 토막 대하듯 덤볐다간 낭패 보기 십상이다. 그녀를 손바닥으로 감싸 안아 뼈대를 다치지 않게 스리슬쩍 살을 저며야한다. 칼의 스침과 동시에 눈물처럼 과즙을 흘리리라. 가여워하는 마음이야말로 사랑의 시작이다. 아주 오래된 감정, 그러나 창자를 채우려는 파충류의 본성은 더욱 오래된 감정, 최후통첩을 보내고 삼지창을 내리 꽂아 한 입 드셔보시라. 가히 과일의 여왕, 눈물 맛이 감칠맛이다. 꽃게다리나 굴비대가리처럼 무릇 맛좋은 부위는 성가스러움이 수반된다. 망고갈비 또한 그렇다. 애첩은 버릴 것이로되 조강지처라면 감탕같이 취할 터이다. 행여 남편차지라면 민주주의가 튼실한 집안이니 축복 있을 지어다. <…먹다 보니 하, 신기하다. / 성한 복숭아보다 / 상한 복숭아가 맛이 더 좋고 / 덜 상한 복숭아보다 / 더 상한 복숭아한테서 / 더 진한 몸내가 난다. / 육신이 썩어 넋이 풀리는 날 / 나도 네게 향기로 확, 가고 싶다.> 양선희 시인의 시구다. 아무리 농염한 복숭아라도 망고의 몸내를 당할쏘냐? 캄보디아는 사시사철 망고강산! / 나순 (건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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