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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우칼럼] 기후가 다르지만
요즘 캄보디아는 한국의 가을 날씨 같다. 아침에는 긴 팔 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서늘하고 밤에는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 우기에는 비가 내리기 전에 잠깐 바람이 불곤 하는데 요즘엔 거의 온종일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무척 시원하다. 한낮에 햇볕에 나가면 따끈따끈하지만 그리 덥게 느껴지지 않는다. 밖에 나다니는 사람 중에 긴 팔 옷을 입은 사람도 부쩍 늘었다. 새벽에는 두꺼운 외투나 점퍼 차림으로 다니기는 많다. 저녁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더위를 식히던 왕궁 근처 강변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줄었다. 강물은 하루가 다르게 수위를 낮춘다. 잔디밭이나 나무 밑에 생활 터전을 마련하고 거기에 잠자리를 틀던 사람들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집도 없이 사는 사람들인데 어디에 가서 추위를 피하는지 궁금하다.
계절이 바뀌었지만 프놈펜 시내에만 파묻혀 사는 사람들에게는 기온이 떨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게 달라질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시외로 조금만 나가면 계절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프놈펜에서 시엠립으로 가면서 길 양쪽 들판을 살펴봤더니 전과는 완연히 달라진 풍경이다. 한창 더울 때에는 온통 녹색으로 덮였던 들판이 거의 생기를 잃고 누르스름한 빛으로 바뀌어 이었다. 프놈펜 가까운 곳에서는 우기에 호수로 변했던 논에 물이 빠지는 대로 차례차례 둑을 쌓아 모내기를 하는 풍경이 띄엄띄엄 보이기도 하지만, 시엠립 쪽으로 올라갈수록 양쪽 들판에는 추수를 끝낸 논에서 소들이 볏짚을 뜯고 있는 농촌 풍경이 펼쳐질 뿐,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삭막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 살던 사람이라 언제나 거의 비슷한 이곳 날씨에 싫증이 나기도 하고 더위 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했는데, 이젠 좀 살 만하다. 그러나 이런 날씨가 그리 오래 갈 것 같지가 않다. 캄보디아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지금의 이런 날씨는 이상 기후에 해당한다고 한다. 덥지 않아서 당장은 좋은데 농사짓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반갑지 않은 현상이라고 한다. 날씨에 매여 사는 것은 한국의 농부들이나 이곳 농부들이나 마찬가지. 지난 우기에는 예년에 비해서 캄보디아에 비가 너무 적게 내려서 농사에 지장이 많았다고 한다. 여름에는 장마와 태풍을 걱정해야 하고 겨울에는 한파와 폭설을 걱정해야 하는 한국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서는 옷 한두 벌 가지고 한 해를 사는 사람들이 태반이야,”
가난한 사람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살아가기 쉽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더운 날씨가 ‘고역’이 아니라 ‘행운’ 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철마다 다른 옷을 챙겨 입어야 하고 때때로 난방 걱정 냉방 걱정을 해야 하는 수고를 이 사람들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지리한 장마와 무더위를 참아내야 하고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야 하는 곳에서 살다가 더운 나라에 와 몇 년을 지내고 나서 내린 결론은, 날씨가 나에게 주는 혜택은 한국이나 여기나 결국 똑같다는 것. 가장 견디기 힘든 한국의 겨울을 뚝 떼어 내서 이곳의 더운 시기와 맞바꾸고 나면 나머지를 살아가는 데는 한국과 비슷하니까 기후에 관한 체감지수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분이 계시겠지만 그러나 어쩌랴. 내 뜻대로 바꿀 수 없는 게 기후이니 거기에 순응하면서 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