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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칼럼] 바나나 나무 너머로 한가위 달이 휘영청…
남편이 가끔 캄보디아 동화를 들려준다. 글자라기보다 복잡한 문양(文樣)같은 게 다 베껴 쓰기도 전에 잊어버리는 크메르어에 질려 애시당초 작파한 나와 달리 아직도 캄보디아어를 익히고 있다. 오랜 노력이 무색하게 남편이 구사하는 크메르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오로지 마누라뿐이다(외계 언어를 구사한들 그 속셈을 모를까 만은…). 어쨌든 요즘은 동화읽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화제가 궁하기로 우리 연식의 부부가 동화타령이냐 싶을지 모르지만, 캄보디아 전래동화는 결말이 너무 독특해 ‘이건 뭐지?’하는 심정으로 남에게 털어놓게 된다.
얘기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한 땅꾼이 독사 굴 앞을 지나는데 독사에게 물려 다 죽게 된 호랑이가 도움을 요청한다. 다급한 상황이라 약초에 침을 뱉어 이긴 후 상처부위에 발라 준다. 죽었다 살아난 호랑이가 자초지종을 듣고 고마워하기는커녕 감히 맹수의 왕에게 침을 뱉었다며 그 사람을 잡아먹으려 든다. 궁지에 몰린 땅꾼은 영리한 토끼를 찾아가 공정하게 처벌해 줄 것을 간청한다. 정황을 짐작한 토끼는 사건을 처음부터 재현해 봐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꼬드겨 호랑이를 다시 독사 굴로 들여보내 죽게 만든다. “동화”하면 “해피엔드”로, 호랑이를 잘 타일러 잘못을 뉘우치게 해 다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을 맺기 십상인데 캄보디아 동화는 이처럼 결말이 잔인한 게 많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하면, 두말할 것 없이 물에 다시 빠뜨려 죽게 내버려두는 식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일대일 대응의 원시적 복수법칙이 섬뜩하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른 인간의 얄팍한 심리를 간파한 게 아닌가 싶다. 은혜를 모르는 인간은 개선이 불가능하니 그대로 되갚아줘야 마땅하다는 인식이 캄보디아인의 전통적인 정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캄보디아인뿐만 아니라 올챙이 시절 처지를 잊어버리는 인간의 선택적 망각은 못 말릴 정도다. 예전 고국에서의 이력이 한층 화려하게 기억되는 이민자들에겐 더하다. 순풍에 돛단 듯 인생이 잘 풀려나갔다면 조국을 떠날 일도 없었으련만, 그 시절의 고초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호시절 기억만 붙들고 있기 십상이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요즘 같은 명절이면 옛날 생각이 더 나는 게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인지상정인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그 시절로 보내주마!” 한다면, 나잇살이 늘어진 몸뚱이를 물찬제비처럼 만들어 준다 해도 “노 땡큐!”다. 역시 추억이 아름다운 건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리라. 냉정하게 되짚어 보면 그때그때 나름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고통이 사라질 때는 잠에 빠져 있을 때뿐”이라는 말을 ‘루쉰’이 했던가, 생각해보면 사람살이가 문제의 연속이고 얄궂게도 고통을 잊게 해주는 건 또 다른 고통일 때가 많다. 부챗살처럼 펼쳐진 바나나 나무 너머 상현달이 휘영청 빛나고 달빛을 받은 망고나무 잎이 은비늘처럼 반짝인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추석 풍경이다. 프놈펜에서 맞는 헐렁한 추석도 나름 좋다. /나순(건축사, UDD건설 naarc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