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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 칼럼] 바지(Pants)
한 부분이 두 다리 사이를 지나가는 것. 각각의 다리를 감싸기 위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 양쪽 다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가랑이가 분리되어 있는 것.
바지(Pants) 원형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정의다. 본디 인류는 남녀 할 것 없이 바지가 아닌 치마를 입었다. 일설에 의하면 중앙아시아에서 말이 사육되면서부터 바지가 등장했다고 한다. 말을 탈 때 허벅지 안쪽 살이 쓸려 아프고 거추장스러워 치마 가운데 부분을 꿰매어 입은 게 그 시초이리라 짐작한다. 바지는 정주족보다 유목생활을 하는 기마족이 먼저 입었는데, 반 유목생활을 하던 게르만인이 중앙아시아인으로부터 전수받은 바지차림으로 로마를 진격한다. 게르만 바지부대와 로마 치마부대의 격돌! 바지가 승리를 거두면서 로마는 멸망하고 만다(고전물에서 남성전사들이 미니스커트를 펄럭이며 발길질을 해대는 전투장면은 시선강탈에도 불구하고 희극적이다). 오늘날의 바지는 군대가 생긴 이래 전쟁을 치루면서 개선에 개선을 거듭해온 진화의 산물이다. 직립보행 하는 인간에게 뛰어난 활동성뿐만 아니라 품위까지 부여한 바지의 발명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다.
여성의 바지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미국에서 1930년대까지 여성이 바지를 입으면 체포될 정도로 바지는 부도덕과 문란함의 상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남자들이 대거 전쟁터로 나가자 여성 일손이 아쉬워졌다. 노동 편의상 여성근로자에게 바지를 허용함으로써 바지를 여성복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당시 태평양 전쟁을 치르던 일본은 한국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일본 농촌여성의 노동복인 ‘몸빼’를 보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성계 바지의 대중화는 서글프게도 작업복에서 비롯된 셈이다. 19세기말 자전거의 선풍적인 인기 또한 바지보급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오랫동안 치마를 고수해 오토바이를 타더라도 다리를 모으고 뒷자리에나 앉던 캄보디아 여성계 역시 산업화에 따른 오토바이 대중화와 함께 불과 몇 년 사이에 바지일색으로 변했다. 남녀 사이 옷에 대한 차별이 없어진 건 생각보다 최근의 일로 1990년대에 이르러서다. 신체구조상 통풍성이 좋은 치마가 남자들에게 더 적합하다는 의학계 진단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선뜻 치마를 선택하지 못해 의복의 평등화는 별 의미가 없긴 하지만.
매년 1월 ‘바지 안 입는 날’이 있다는 사실. 하루만이라도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삶을 즐기자는 취지로 2002년 뉴욕에서 시작된 게 지금은 세계 60여 개 도시로 확산되었다. ‘영웅적인 행동’보다 ‘자극적인 행동’이 단연 주목을 끄는 시대, 진지한 사람을 불가촉천민 마냥 기피하는 키치(Kitsch)시대 전형의 행사인 듯하다. 남녀노소가 팬티바람으로 공공장소를 누비는 모습을 보면 모피를 두른 네발짐승에 비해 얼마나 허술하고 어릿광대 같은지, 새삼 인류문화에서 ‘바지’의 위상이 느껴진다. 외눈박이 나라에서는 양눈박이가 비정상이라던가, 하의실종이 대세인 곳에선 갖춰 입은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고.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