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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 칼럼] 박 근혜와 도널드 트럼프
꾸준히 높은 경제 성장을 기록하던 IMF사태 전까지만 해도 고용이 안정돼 있어서 알뜰살뜰 살다보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내 차 내 집을 마련하는 일련의 수순을 밟아갈 수 있었다. ‘모든 게 자기 할 나름’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 통하는 시절이었다고 할까.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모든 것이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수천 개에 달하는 유수기업의 도산을 시작으로 대량 실업, 자산가치 폭락, 가족 해체, 자살률 급증…, 그야말로 6.25이후 최대의 국난을 맞았다. 아직까지 원인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정경유착에 의한 부패와 정부의 관리실책이 주요인으로 드러나면서 바닥 민심까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IMF 이후 계속되는 실정으로 그 분노는 강력한 경제성장을 이끈 박정희 향수로 이어져 자신의 언어 한마디 없고 자기 옷 하나 고르지 못하는 박근혜대통령을 당선시켰고, 오늘날 선무당 정치가 빚은 역사상 최악의 막장 국면을 겪고 있다.
철학의 허접함에 있어서 박근혜와 우위를 겨루기 힘든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트럼프 현상역시 2008년 미국 발 금융대란의 연장선에 있지 않나 싶다. 결국 고객은 파산해 알거지가 됐는데 임원들은 보너스 파티를 벌인 것으로 드러난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가 기층민에게 더 이상 주류집단의 술수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기성 금권정치에 대한 반감으로 각인 되었을 테니까. 마이클 무어는 트럼프 당선 요인으로, 이민자와 저개발국가에 일자리를 빼앗긴 쇠락한 산업지대 노동자의 분노와 흑인에게 8년이나 지배받고 8년을 또 여성에게 지배받아야겠느냐는 백인남성의 적의를 꼽았다. 출발선이 비슷하고 일한만큼 보람이 돌아오는 건전한 사회라면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서 사람을 움직이는 게 가능하지만, 기회와 성과를 독식하는 불만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사람을 움직이려면 증오심에 호소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 증오는 판단을 흐리게 한다. 또한 판단이 트릿한 사람일수록 쉽게 격분하기 마련이다. 트럼프 진영은 무엇보다 소외된 백인남성의 원초적 마초심리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증오를 부추겼다. 말이 좋아 ‘소외된’이지, ‘무지한’ 백인남성의 증오심을 표출시키는데 성공한 셈이다.
공적을 만들어 이간질하는 짓은 협잡꾼들이 훨씬 잘한다. 이 시대 그들은 부와 정보, 미디어를 장악하고 양식 있는 사람들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태연하게 저지른다. 지역감정, 성·인종차별, 세대갈등, 선거에 이길 수만 있다면 더 추악한 선동도 서슴지 않는다. 양극화가 심해져 사회가 불안해질수록 정치지도자의 자질은 더 떨어질 수밖에. 자칫 잘못했다간 박근혜와 트럼프보다 더한 치들이 뽑힐 수 있겠다 싶은 게, 걸리버 여행기(1726년)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마음대로 불러낼 수 있게 된 걸리버가 대의민주제를 예견하는 대목이 생각난다. “나는 대의사당 한곳에 ‘로마 원로원’이 나타나고 다른 곳에는 ‘현대 의회’가 나타나기를 간청했다. 그랬더니 전자는 영웅과 반신의 회합 같았고, 후자는 행상인과 소매치기와 노상강도와 깡패의 패거리 같아 보였다”/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