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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 칼럼] 버킷 리스트
인류 대부분은 스토리 중독자라고 한다. 누구의 삶이라도 100분으로 압축하면 영화가 될 법도 한 것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영화가 그 대표적인 증거일 테다. 깨뜨리기 힘든 현실의 틀을 벗어나 직접체험이 가당치 않은 세계로 냉큼 접근할 수 있다는 게 영상이 갖는 매력이다. 무엇보다 어떤 아비규환 속에 빠지더라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감과 동시에 안전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타고난 새가슴에 구들장 체질인 나 같은 사람에겐 제격이 아닐 수 없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목록’을 뜻하는 <버킷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다. 어른 아이 다함께 보는 영화는 어른 측에서 얼마간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가족 영화로 괜찮은 편이다. 말기 환자인 두 노인이 병원에 누워 죽을 때를 기다리느니 평생 해보고 싶었던 거나 하다가 죽자며 병원을 뛰쳐나오는 단순한 스토리다. 두 시한부 인생을 통해 삶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 사유해보게 하는 영화지만 클래식카 레이싱, 프로펠러 비행, 호화 만찬 등, 모두 웬만한 재력으로는 실행할 수 없는 목록들이라 리얼리티가 조금 떨어지는 게 흠이다.
아내가 죽으면 하고 싶은 일 “마누라 암 리스트 3”가 거론되는 영화도 있다. 오로지 한 장면만 기억나는 영화로 늦은 밤 비몽사몽간에 보다가 그 대목에서 피식 웃었던 것 같다. 이웃끼리 다 알고지내는 소도시의 한 커피숍에서 초로의 두 남자가 노닥거리는데 “만약에 마누라가 암으로 죽는다면 결혼하고 싶은 여자 1, 2, 3”을 꼽은 후 서로 중복되지 않았는지 확인해가며 키득댄다. ‘우리가 알고 싶어 안달하는 진실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야’, 무심하게 던지는 감독의 메시지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진실이란 생각보다 누추하고 섬뜩하게 마련 아니던가.
죽고 난 후의 일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살아생전에 꼭 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도 별반 떠오르는 게 없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 세상에 대한 환상이 많이 깨진 탓인지. 순전히 우연에 기대야하는 것이지만 솔깃한 이야기로 나를 미혹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쯤은 한 가지 꼽고 싶다. 센스와 유머에 상투적이지 않은 언어를 가진 사람과의 만남은 언제나 최고의 즐거움이니까. 혹자는 프놈펜을 늪 같은 도시라고 한다. 아등바등해봐야 되는 노릇도 없고, 기다리다보면 안 되는 노릇도 없는. 일 년 내내 께느른하니 더운 날씨라 그런지 ‘존재이유를 증명하는 게 대수인가?’ 하는 캄보디아적 정서에 동화돼 가는 느낌이다. 청담(淸談)은 차를 마시며 나누게도 되지만 술잔을 기울여야 지긋해지는 구석이 있다. 그러니까 버킷 리스트고 뭐고, 프놈펜 노을을 배경삼아 어울려 석양주나 홀짝이는 평범한 술꾼으로 살고 싶다는 얘기였나.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