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한가위의 프러포즈

기사입력 : 2016년 10월 13일

이상하게 이번 리우올림픽은 폐막한지도 모른 채 무심코 지나쳤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스포츠경기가 아니라 한 쌍의 러브스토리다. 중국 여자 다이빙 은메달리스트 허쯔가 공개 프러포즈를 받았다. 메달 수여식이 끝난 뒤 축하 행진을 하려는데 한 남자가 허쯔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는다. 반지를 꺼내 내밀고 나직이 노래를 부른다. 가만히 듣고 있던 허쯔가 눈물을 흘리며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이자 관중석에서 큰 환호가 터졌다. 세계의 시선 앞에 담대한 퍼포먼스를 펼친 주인공 남자는 같은 중국 다이빙 선수다. 남자사람과 여자사람 간 성별역할 평등을 두고 갈등이 첨예화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남성이 격식을 갖춰 여성에게 청혼하는 낭만적인 프러포즈는 모든 인류의 로망인 모양이다.

누구에게도 멋들어진 프러포즈를 받아본 적은 없지만, 실제 거창한 프러포즈를 받는다면 그에 걸맞은 열정을 내내 이어갈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올 것 같다. 사람에 따라 에너지소비 등급이 다르게 설계된다던가, 우리같이 저 전력으로 설계된 부류는 연애도 뜨뜻미지근하게 발동이 걸린다. 남편과 데이트를 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출퇴근 방향이 같았기 때문이다. 넓디넓은 서울바닥에 하필 그 동네였나 하면 동생이 다니던 대학 근처에 집을 얻다 보니 그렇게 됐다. 숙명적인 만남하고는 거리가 있는 우연의 소산인 셈이다. 어디 결혼뿐인가, 열정적이지 못한 성정 탓인지 진학이니 취직이니 이민이니, 내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던 결정적인 사건들 대부분 우연한 일에서 비롯되었던 듯싶다.

남편은 자신만큼 확실하게 프러포즈를 한 사람은 드물 거라고 우기곤 한다. 내가 결혼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된 건 추석을 며칠 앞둔 요맘때였는데 남편이 (예비)시모께서 챙겨주신 음식을 들고 와 시부 성묘를 다녀오자고 했던 일을 두고 하는 얘기다. 음흉한 속셈도 모르고 싱거운 얘기에 꺄르르거리며 따라 올라갔던 산길이 제법 운치 있게 느껴졌다(막상 결혼하고 나니 왜 그렇게 멀고 험하게 느껴지던지). 시모께서 요모조모 싸주신 성묘음식을 결혼 후 내손으로 장만해야 할 미끼인 줄도 모르고 덥석 맛있게 받아먹었으니… 그래도 어지간히 인생을 살고 보니 세인의 이목을 끄는 화려한 사랑도 좋겠지만, 상대가 나를 견뎌주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알고도 모른 체 해주는 구닥다리 방식도 괜찮지 싶다.

그리곤 며칠 후 추석날엔 시댁에 첫 선을 뵈러 갔다. 호기심에 눈을 빛내던 시누이, 아주버님, 형님들이 어느덧 휴대폰에 손자손녀 사진을 걸어두는 나이대가 되었다. 나라고 세월이 비켜갈 리 없으니 시들해진 성의를 쥐어짜보지만 이번 추석은 지난 리우올림픽만큼이나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해외살이 처지라 그렇겠지만, 누가 일찍 왔느니 늦었느니, 홍동백서니 어동육서니, 부산떨었던 일들이 심드렁하게 느껴진다. 고대고대 하시다가도 보자마자 잔소리부터 하시던 양가 부모님 모두 기어이 조상님이 돼버리신 탓인지…/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