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술꾼을 위한 변명

기사입력 : 2016년 07월 27일

“…한 사람이 맥주잔에 의치(義齒)를 빠뜨린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은 한술 더 떠야 할 것 같아서 점잖은 몸짓으로 의안(義眼)을 뺀다. 또 한 사람은 알루미늄으로 된 의족(義足)을 뺀다. 그곳에 모인 사람 모두가 광기에 사로잡힌다. 여자들은 가짜 속눈썹을 떼 내어 위스키 잔에 넣었으며, 곧이어 거들, 탈장대, 평발용 뒤축 등이 탁자 위에 놓인다. 이것이 술의 힘이다…” 작가 앙투안 블롱댕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이다. 빈병이 늘어선 낭자한 술자리는 얼마나 허심탄회한가. 늘 치통을 앓는 듯한 얼굴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도 허세를 벗어던지고 천진스런 눈빛을 되찾기 마련이다. 평상시 할 말 다하고 사는 독재자 타입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인류의 과반이 술김에 만들어졌다는 통계로 보건대, 수줍음이 많은 사람일수록, 문명화된 사람일수록 술을 더 탐닉하지 않을까 싶다.

술의 역사를 언급하는 건 불필요한 일일 테다. 코끼리, 원숭이, 새들까지 술을 즐기는 형편이니. 아프리카에 마룰라(Marula)라는 나무가 있다. 잘 익은 열매가 땅에 떨어져 숙성되면서 알코올성분이 나온다. 그 냄새를 맡고 멀리서 동물들이 찾아와 마룰라(Marula)주 축제를 벌인다. 술 취한 원숭이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주저앉는 모습은 인간취객과 다를 바 없다.

이튿날 숙취에 시달리며 성찰(?)하는 모습까지. 역사적으로 금주법의 시대는 있었다. 미국, 소련, 캐나다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금주법을 시행한 적이 있고, 이슬람과 청교도 문화권은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금했다. 곡주가 대세인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에서는 기근이 들면 식량이 부족해 금주령이 발효되곤 했다. 그러나 인간의 오래된 쾌락을 금지해서 성공한 전례가 없다. 취기와 함께 잠시나마 진부한 일상에서 해방되려는 인간의 의지는 ‘마시다 죽어도 좋아’ 정도였다. 주류규제가 느슨한 캄보디아에서 불량 전통주를 마시고 사망한 친구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똑같은 술을 마시고 사망한 사건까지 있었으니. 술이 금지된 사우디에 한창 건설 붐이 일었던 80년대, 한인끼리 몰래 빚어 마셨던 밀주 레시피를 들으면 그 기발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커다란 생수통에 적정량의 포도주스와 설탕, 이스트를 넣고 밀봉한 후 발효시키는데 꼭지에 폭발 방지용 빨대를 꽂아두는 게 백미다.

요즘은 술꾼을 루저로 보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신입 때만 해도 술자리를 근무의 연장쯤으로 여겨 직장생활에서 술이 빠질 수 없었다. 세상에 뭔가 증명해 보이고 싶어 일도 술도 지고는 못 배기던, 이른바 센 언니인척 하던 시기가 있었다. 고단한 일과 후에도 그렇지만 다음날 일정이 빡빡한 날일수록 술의 유혹에 더 솔깃하게 마련이라, ‘딱 한잔만’으로 시작되는 저녁은 하수상하기 십상이다. 아쉬움이 딱 한잔을 부르고 또 불러 결국 생수통으로 한잔이 되기 일쑤였으니(행여 제 우아한 이름 ‘나순’이 ‘낮술’로 둔갑할지 몰라 낮술은 절대 사절입니다. 물론 내일부터). 그럼에도 그때는 술배가 큰 만큼 자신감도 컸는데… 나이 들수록 작아지는 술잔만큼이나 배포도 쪼그라드는 듯하다./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